저자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며 이야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일이십 대 시절 접했던 작품들을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작품은 항상 그 시절 그대로의 색감과 메시지를 유지하고 있지만 내가 달라졌고 시대가 달라졌다. 익숙한 해상도가 다르고 가끔은 맞춤법도 다르다. 더는 <프리티 우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무조건 찬양하는 자세로 소비할 수 없게 되었다.
가끔은 씁쓸하고, 가끔은 그 시절의 내가 왜 그렇게나 그 작품을 좋아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행히 그 시절 뜨겁게 사랑했던 작품들을 다시 보다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 기쁨은 배가된다. (11~12쪽)
나도 예전에 좋아했던 작품을 지금은 좋아했다고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것들도 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런 것을 좋아했을까.
어떤 것은 대작이 되고, 어떤 것은 망작이 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평판이 뒤바뀌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리 자신이 바뀌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말한다.
《불안의 서》를 처음 읽고 찬양하던 때와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은 지금. 그사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나의 불안만은 그대로다. (12쪽)
그런데 저자는 최근엔 조금 다른 각도로 불안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불안을 아이라고 생각하고 케어하는 거다.
이거 괜찮은 방법이다. 나도 불안을 없앨 수 없으니 불안을 어린아이 다루듯 잘 데리고 다니면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읽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