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의 상소로 인해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했다. (책날개 중에서)
이 책은 『징비록』권1, 『징비록』권2, 녹후잡기, 해설의 순서로 전개된다. 『징비록』권1에는 자서, 제1장 '전란 전 대일관계', 제2장 '전란대비책', 제3장 '임진왜란의 발발과 초기 전투 상황', 제4장 '충주의 패전과 파천 논의', 제5장 '선조의 몽진과 구원군의 요청', 『징비록』권2에는 제6장 '의병의 활동과 명군의 평양성 탈환', 제7장 '도성 수복과 백성들의 동향', 제8장 '일본군의 재침과 정유재란의 전개', 제9장 '이순신의 재기용과 명량해전', 제10장 '일본군의 퇴각과 노량해전', 제11장 '이순신의 인품'이 수록되어 있다.
녹후잡기에는 제1장 '전란 발생의 전조', 제2장 '전시 중 각종 대비책', 제3장 '김성일의 죽음과 제2차 진주성 전투', 제4장 '정유재란', 제5장 '심유경', 해설에는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중용 속에서 대안을 찾은 재상 유성룡,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 3국 정세, 왜 지금 『징비록』일까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