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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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펼쳐들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멈추게 된 책이었다. 책 속의 모든 것이 나의 기억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여행지의 사진도 어딘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작가의 글도 옛 추억에 잠기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분명히 저자의 책인데 구석에 처박혀 먼지 풀풀 날리고 있는 나의 옛 일기장을 우연히 꺼내어 읽는 듯한 책이었다. 그 책이 바로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 였다.

이 책은 74만 독자가 선택한 『생각이 나서』 작가 황경신의 이야기노트 『달 위의 낱말들』이다.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기적

그러나 네가 돌보지 않았던 기적이다. (책 띠지 중에서)

이를테면 하루가 저물고 또 하루가 오는 일, 하루를 살기 위해 네가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 때로 부주의하고 때로 불친절한 너를 견디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 무너진 마음을 다독이는 일이 모두 기적이다. 기억하지 않아도 돌보지 않아도 묵묵히 일어나는, 갸륵한 기적이다.

_본문 중에서

본문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기 전에 표지 그림과 몇 가지 문구를 보고 이미 이 책에 빠져들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하면서 이 책 『달 위의 낱말들』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황경신.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안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며 쓰다 만 글을 생각한다. 생각의 꼬투리가 잡히면 컴퓨터를 깨우고 쓰기 시작한다. 틈틈이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샤워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고 글을 쓰다가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러다가 쇼핑 사이트를 열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한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가끔 번거롭고 대체로 느긋하다. 종종 고요하고 자주 행복하다. (책날개 중에서)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인연과 선택과 기적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5쪽)

이 책은 2부로 구성된다. 1부 '단어의 중력'에는 내리다, 찾다, 터지다, 쫓다, 지키다, 오르다, 이르다, 버티다, 닿다, 쓰다, 고치다, 선택, 미래, 행복, 막장, 인연, 기적, 안녕, 원망, 공포, 몽매, 단순, 침묵, 미련, 소원, 연민, 고독, 재회, 2부 '사물의 노력'에는 컴퓨터, 자동차, 오디오, 소파, 토끼, 전화기, 피아노, 카메라, 책, 청소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을 펼쳐들고 읽어나가며 이내 익숙해진 것은 황경신의 노트, 황경신의 언어여서일 것이다.

한동안 음미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고, 그 간극이 무색하게 다시 익숙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언젠가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또다시 나는 이 책을 문득 툭 꺼내들어 음미하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이 책의 시작부터 하고 있었다.



이 책의 순서는 단어로 되어 있다. 요즘 들어 자꾸 내 언어의 폭이 좁아지고 한정된 언어 속에서 살아가며, 때로는 그 언어도 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이 책에서 던져주는 단어가 기억 속의 나를 끌어올려 준다.

신기하게도 이번 책 역시 황경신의 노트이지만 나의 노트를 찾은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그건 제목이 너무나도 평범한 단어여서 그럴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구든 그 단어를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될 것이다.



뭉뚱그려 대충 넣어둔 예전 기억을 꺼내어 섬세하게 펼치고 정리하고 의미를 담아 생명을 불어넣는다. 단어를 쪼개고 다듬어 새로운 의미를 들려준다. 가만히 듣다 보면 몰랐던 무언가가 번뜩이며 파지직 떠오른다. 그렇게 하나씩 깨달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노트를 보며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1부는 나의 노트를 들여다보는 느낌, 2부는 작가의 고백을 듣는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소금기 어린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기 위해 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네가 움직이자 세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류가 멈추고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 익숙하지 않음에 익숙해진 너는 비로소 안도한다. 여름이 지나갔다. 이제 너는 과거 속에 고요히 잠이 든 시간을, 잠시 행복에 잠겼던 순간을, 네 곁에 머물렀던 불완전한 기억을 쫓으며, 가을과 겨울과 봄을 견딜 것이다. 완전을 원한다면 둘 보다 하나라고 되뇌며, 무언가에 쫓기듯 생각을 쫓을 것이다. (32쪽)

지금은 한여름의 시기이지만, 곧 이 글과 딱 맞는 날이 올 것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가벼운 나날도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는 언어로 둔갑한다. 평범한 그런 날의 생각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표현이 좋다.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표지의 달이 더 반짝인다. 일상의 순간이 달처럼 반짝거리기를. 나에게도 저자의 표현처럼 '갸륵한 기적'으로 여길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이 책을 읽으며 과거를 바라보고 미래로 향하고 있는 나를 본다. 이 책이 나를 그렇게 이끌어준다. 평범한 단어도 의미를 쪼개고 다듬어 갈고 닦아서 보석처럼 내 앞에 보여주는 책이니, 단어들 속으로 푹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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