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이론적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연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이유를 스스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데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종종 왜 정신과의사가 되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한마디로 사는 게 힘들어서였다. 나 역시 나와의 오랜 불화를 겪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부족함에 집착했다. 아홉을 잘해도 하나 못한 것에 대해 안달복달했다. 특히 숫기가 없고, 운동을 잘 못하고, 고민이 많고, 남들 앞에서 긴장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대인불안이 심해져서 가게를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 일 없는 날에도 삶이 버겁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자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정신과의사가 되고 나서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실은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아버지는 늘 자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 못하는 것을 가지고 혼내기만 했다. 당신의 좌절된 꿈을 자식들이 대신 이루어주길 바랐고, 자기가 살지 못한 삶을 자식들이 살아가도록 원했다.
사실 겉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완벽주의 성향은 내면의 자기멸시에 따른 반작용이었다. 문제는 아버지의 바람은 격려가 아닌 강요로, 지지가 아닌 비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시선은 나도 모르게 내면화되었다. 못마땅한 자식은 못마땅한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52~53쪽)
이 책의 제목이 확 와닿은 것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에 이어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말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욱 확고해졌다.
우리는 자기 부족함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자아상 때문에 자기 부족함에 집착하는 것이다. '내면화된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어내지 않는 한 내적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인 결과가 자신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삽질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질문을 맞닥뜨릴 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56쪽)
이 질문의 무게감이 엄청 무겁게 다가오면서 번뜩이는 실마리를 잡은 듯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자기치유의 방향을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