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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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굳이 왜 나에게 그런 말들을 쏟아부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나'여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이야기가 누구에게 전해질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이 책을 보니 그때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명의 일이 아니라, 자그마치 3년간 남겨진 통화 10만 통이다. 아마 이 프로젝트를 알고 나면 이 책이 달리 보이고 더욱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먼저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옮겨본다.



여러 대의 아날로그 전화기가 보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벨이 울리고 있습니다.

한 다이얼 전화기 앞에 다가가 봅니다.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를 받아보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어보니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떨리는 목소리, 망설이는 목소리,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인생 살기 힘들다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헤어진 연인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사람,

엄마를 부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짧고 긴 고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요?

이제는 거리에서 사라져버린 공중전화 부스가

공간 한쪽 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글이 보입니다.

"차마 말하지 못해

부재중 통화가 되어버린 이야기,

당신에게도 있나요?

이제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겨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그 어떤 말도 괜찮습니다."

요금을 넣을 필요도, 전화번호를 누를 필요도 없습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면 녹음을 알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하고 싶은 말을 남기면 됩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가요?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부재중 통화는 무엇인가요?

이곳에 남겨진 이야기들은 데이터화되어 공중전화 부스 밖,

우연히 수화기를 든 누군가에게 랜덤하게 전달됩니다.

전시가 끝나면, 남겨진 이야기들을

세상의 끝에 놓아주는 의식이 진행됩니다.

2018년 처음으로 모여진 부재중 통화들은 2019년,

지리적 세상의 끝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바람 속에

자유롭게 놓아졌습니다.

이후 2021년까지 모인 통화들은

사하라 사막의 고요 속으로 흩어질 예정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부재중 통화들은

상대방이 듣지 못해도 닿길 바라는 목소리들입니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작은 파동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구체적으로 본문을 읽기도 전에 앞부분을 읽었을 뿐인데 나에게 전율이 느껴졌다.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프로젝트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차마 전할 수 없는 이야기도, 전해지지 못할 이야기도, 여기서는 모두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속엣말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하기도 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 각자의 풀리지 않는 마음을 조금씩 모아 뭉텅이로 엮어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멋진 퍼포먼스를 진행한 작가는 국내 웹아트 1세대 작가 설은아다.

설은아는 국내 웹아트 1세대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웹사이트 '설은아닷컴'으로 제1회 국제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 후 '포스트비쥬얼'이라는 디지털 광고대행사를 만들어 2004년 한국 최초로 칸 국제광고제에서 사이버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나이키, 이니스프리, 유한킴벌리 등의 디지털 캠페인을 맡으며 70여 차례 해외 광고제에서 수상했고, 2019년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최근엔 20년간 재직했던 일을 떠나, 그동안 꿈꿔왔던 작가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소외된 소통을 주제로 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선보였다. 20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2021년까지 약 10만 통의 목소리를 모았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아르헨티아 우수아이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바람 속에 놓아주는 퍼포먼스 필름은 세계 3대 단편 영화제인 '탐페레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국제 경쟁, 다큐멘터리 부문에 후보로 선정되었다. (책날개 발췌)





전시장에 설치된 공중전화기에 이야기를 남기거나, 전화번호 1522-2290에 전화를 걸면, 데이터 서버에 목소리가 차곡차곡 저장된다. 적게는 십여 통, 많게는 수백 통. 전시가 없을 때에도 매일 부재중 통화가 남겨진다. 이렇게 들어온 이야기들을 정기적으로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3년째 해오고 있다. (342쪽)

사람들이 풀어내지 못하고 각자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말을 모으고 다른 공간에 놓아주는 의식까지 한다는 발상이 참신했다. 예술의 세계가 아니면 이런 마음들을 모으고 펼쳐서 놓아주는 작업까지 연결되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진정 위로가 되었던 건 "괜찮아, 힘내"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있는 '하지 못한 말'이 쏟아져 나와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도록 하니,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이 책으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전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키득 웃다가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가 한참 힘들 때군, 생각했다가, 온갖 감정이 오간다.

전시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이 책을 펼쳐드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까지 이들과 함께 모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느낌이 들어서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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