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장례식
박현진 지음, 박유승 그림 / 델피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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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살아가며 가장 잘 알듯한 가족을 사실 의외로 잘 모르고 지낸다. 이 책의 저자는 그림엔 소질이 없고 미술을 잘 알지도 못한다고 본인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가 화가의 아들이라니 거기에서부터 이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관심이 증폭된다.

프롤로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2007년, 아버지에게 양극성 정동장애와 암이라는 정신과 육체의 병이 찾아왔다. 높은 산 같기만 하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너져 내리던 순간, 나는 아버지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니 그것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키기 위해 버티는 삶이 시작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회복을,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가족도 의사도 아닌 아버지 당신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굽은 몸으로 쓰러졌던 이젤을 다시 세우고 흐트러져있던 붓끝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던 강렬하고 밝은 색채로 채워진 캔버스는 생명을, 치유를, 기적을 노래하고 있었다. (5쪽)

이 책의 저자는 화가의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아버지와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써서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받아서 이 책 『화가의 장례식』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박현진. 화가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쓰며 묵은 감정들이 씻겨 나가는 것을 경험하고, 글과 그림이 누군가에게 마음 치료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그림은 박유승. 박유승 화백은 작품활동으로는 개인전 3회, 한솔갤러리 개관초대전, 제주작가 9인전, 제주프레비엔날레,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대한민국 기독교미술대전, 제주-오키나와 미술교류전, 터전, 제주의 빛, 한미협 지상선, 제주미술제 등에 출품하였다.

박유승 화백은 말년에 찾아온 정신과 육체의 병을 짊어지고 7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본능적으로 존재의 원초성을 추적하는 유년의 기억과 바람에 날리는 씨앗처럼 작가의 의식 속에서 제주를 두른 돌무더기와 억새 바람, 해녀의 숨비소리, 땀이 밴 갈증이 노래와 토박이 남녀의 사랑 등 제주의 원시를 화폭에 담았다. (책날개 발췌)

이 책에는 27가지의 글이 담겨 있다. 최초의 대화, 하얀 사람, 가장 슬픈 사람, 주인 잃은 그림, 구원의 언저리, 늦추위를 뚫고 온 겨울 해녀, 우리는 늘 발가숭이였다, 마지막 얼굴,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양극성 정동장애, 내 마음은 어떻겠니, 또 다른 고통, 기적, 먼저 손을 내민 건 아버지였다, 지키지 못한 약속,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중력을 잃은 세계, 불을 만나다, 마지막 여행, 집으로, 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완벽한 일상, 바람이 분다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아들로서 들려주는 아버지의 모습과 이야기가 저자의 아버지 박유승 화백의 유작과 함께 담겨 있다. 나처럼 작품만 보았을 때 그 느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이야기와 함께 작품을 접하는 것이 놀랍도록 풍성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삶과 죽음과 고통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감정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그 담담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와서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울컥하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 책이 아니면 알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뒤흔들며 한참을 머문다.



특히 저자가 아버지 몰래 병원을 찾아, 아버지에게 우울증 진단을 내렸던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양극성 정동장애. 내 설명을 가만히 듣던 의사는 종이에 누워있는 S자 그래프를 그리며 아버지의 병을 설명했다. 흔히들 조울증이라고 하는 이 병은 주기적인 사이클이 있다고. 누구나 우울감과 들뜬 상태를 경험하지만, 정상인의 경우 어디까지나 정상범위를 넘지 않는다고. 양극성 정동장애는 그 정상범위를 넘어 극도로 우울해지고, 극도로 들뜬 상태가 된다고. 울증의 상태가 회복되면서 서서히 조증으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이 병의 사이클이라고.

조증 상태에서 환자는 정신적 활동이 활발해져서, 수면 욕구가 줄어들고, 쉽게 짜증을 내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했다. 과대망상에 빠져들고, 충동적이 되고, 주변의 자극에 쉽게 반응하고 주의가 끌린다고 했다. 그제야 그동안 아버지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었다.

의사는 입원을 권유했다. 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약물치료만으로 우울증을 극복했으니, 이번에도 약물치료로 어떻게든 치료해 보겠다고 했다. 의사는 조증 상태에서는 본인 스스로가 마치 신이 될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병을 자각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복용하고 몇 분 이내에 잠이 드는 센 약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도 일단 약은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봄부터 복용하던 정신과 약을 언제부턴가 이미 중단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가 약을 먹게 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머니는 처방받은 약을 갈아서 뜨거운 유자차에 탔다. 그런 방법 외에 딱히 선택할 길이 없었다. 나는 저녁을 마치고 TV를 보는 아버지에게 차가 참 달다며 찻잔을 건넸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차를 받아 마신 아버지는 의사의 말대로 10분도 되지 않아 잠을 자야겠다며 안방으로 향했다. (71쪽)



가족이기에 쓸 수 있는 책이다. 가족이어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 책이 더욱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것일 테다. 가감 없이 진솔하게 써내려가서 이렇게 마음에 훅 들어오는 것이리라. 글은 박유승 화백의 장례부터 진행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죽음보다 더 강한 예술혼에 온통 사로잡히는 것을 느낀다.

책을 읽을 때에, 펼쳐들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이 책에 담긴 박유승 화백의 그림도, 글을 풀어내는 화가의 아들 이야기도 내 마음을 흔들어놓아 이 여운이 꽤나 오래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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