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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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읽을까 말까 고민 끝에 읽어보기로 했다. 왜 고민을 했냐면 너무 실감 나서 벌벌 떨게 될 것 같아서였다. 햄버거와 얽힌 학원괴담, 한국에서 노동을 하는 뱀파이어, 특히 '살인 청소로봇'이 무언가 무서울 듯해서 '안 볼란다' 했다.

나는 왜 이런 게 그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출시한 지 불과 30년 만에 청소로봇이 주인을 살해하고 시민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인공지능의 위험성과 살인사건에 초점을 두는 반면 데일리K의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소로봇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R은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청소로봇 대신 시민 R로 불리길 바라지만 R은 자신이 청소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_「시민 R」

하지만 세상은 밝고 환하고 동화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학원괴담, 뱀파이어, 느와르, 외계인, 무협, 오컬트, 로봇살인 같은 것도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 눈 감고 보는 것도 나름 스릴 있고 좋다.

어쩌면 나를 뒤흔들고 말 문학작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몇 날 며칠을 나를 끈질기게 설득하였고, 결국은 이 책 『펄프픽션』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다섯 작가가 들려주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우리 시대 젊은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 조예은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한국 블랙코미디의 최전선에서 각종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류연웅의 「떡볶이 세계화 본부」, SF계의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홍지운의 「정직한 살인자」, 다양한 장르를 변주하며 장르문학을 선도하는 이경희의 「서울 지하철도 수호자들」, 청소년 소설과 동화에서 SF의 족적을 남긴 최영희의 「시민R」로 나뉜다.

펄프픽션은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싸구려 잡지인 펄프매거진에 실리는 소설을 뜻했던 용어로, '싸구려 소설' 혹은 '삼류소설'을 의미한다고 한다. 주류문학의 협소한 기준에서 벗어난 다양한 양태의 소설 특히 장르소설을 조롱하는데 오용되기도 했으나, 하나의 장르로 재발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펄프픽션』은 21세기 대한민국식 펄프픽션을 정립해보고자 기획된 앤솔로지다.

첫 작품 조예은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부터 강렬하다. 읽고 나니 햄버거가 무섭다. 당분간 햄버거 못 먹겠다. 이럴 줄 알았다. 너무도 실감 나는 글을 읽으며 장면 장면을 상상하니, 실제로 이런 일들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게 무섭다.



류연웅의 「떡볶이 세계화 본부」는 아마 대략 스토리를 알면 더 읽어보고 싶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맵고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우리의 주인공 김신전. 그는 영국에서 내한한 배우들에게 무심코 떡볶이를 먹였다가… 너무 매워서 배우들이 즉사하고 만다. 우연한 사고였지만 대중의 질타로 떡볶이 장사를 접고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그에게 찾아온 국정원 요원. 영국에서 김신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말인즉슨 영국에서 활개 치는 뱀파이어들에게 피로 만든 떡볶이인 척, 겁나 매운 떡볶이를 먹여 죽여 달라는 것이었는데……! (보도자료 중에서)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건 작가 후기에서 본 작품 탄생 비화였다.

이 작품은 한때 저에게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떡볶이를 먹는다'라고 뻥을 쳤던 친구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떡볶이 소스가 '피', 하얀 떡이 '살'이라는 근거를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속아버려서 그 유사신학을 전파하고 다녔는데, 나중에야 친구가 저한테 와서 "풉. 그걸 믿었니?"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96쪽)



'이런 소재를 이렇게?',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끌어간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토리 전개가 박진감 넘치고 참신했다.

그리고 청소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시민 R」을 읽고 나니 저쪽에 가만히 있는 청소기가 눈에 거슬려 덮어두었다. 독자의 상상력도 끌어올려 주며 내 주변의 마이너들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고블 앤솔로지 『펄프픽션』이다. 21세기 대한민국식 펄프픽션을 정립해보고자 기획된 앤솔로지다.

이 책을 읽으며 실감나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초대받았다. 마이너한 대상을 주인공으로 한 펄프픽션인데 작품 하나하나 실제 사실인 듯 읽어나갔다. 소설을 읽으며 어느 순간 소설이라는 생각을 잊고 그게 실제상황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만큼 작품에 몰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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