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극장
온다 리쿠 지음, 김은하 옮김 / 망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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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대학 시절을 함께한 두 여자, 왜 강물로 몸을 던져 동반 자살했을까?"라는 띠지의 질문에 대한 호기심에서였고, 두 번째는 온다 리쿠가 저자라는 점에서였다.

온다 리쿠는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라고 알려져 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다른 책에서 읽었던 온다 리쿠의 이야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써야 할 분량을 정해놓고 쓰진 않아요. 잘 안 써질 땐 펜을 놓고, 잘 써질 땐 한꺼번에 몰아서 쓰죠. 영감이 안 떠오르면 싱크대 청소를 해요. 저희 집이 깨끗하면 글이 잘 안 써지고 있다는 겁니다."

『글쓰기 훈련소』를 읽다가 본 온다 리쿠의 인터뷰 내용이다.

나도 사실 무언가에 집중할 때에는 청소는 뒷전으로 미루게 되고, 뭔가 잘 안 풀리는 경우에 비로소 청소에 신경 쓰게 되니, 그 인터뷰를 보며 무척 공감했다. 그 이후로는 '온다 리쿠'하면 이상하게도 작품보다는 그녀의 집이 지금 깨끗할까 더러울까에 궁금증이 생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야 말게 된 동기는 이거였다.

그 기사는 채 몇 줄 되지도 않는 단신 기사였다.

신문에 실린 위치도 소위 삼면기사. 그러니까 신문이 사면으로 발행되었을 때 게재된 사회기사였다.

같은 나이 또래의 두 여자가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동반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둘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대학 시절 친구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쩌다 그 기사에 시선이 닿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기사가 내 눈에 확 들어온 느낌이랄까. 충격이 컸다는 사실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21쪽)

지금도 매일같이 수많은 사건사고가 스쳐 지나가는데, 어떤 사건은 이렇게 누군가의 작품으로 재탄생 된다. 작가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들어 몇 년을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휘감길 수 있다는 점이 놀랍고 특별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소설이 더욱 궁금해져서 이 책 《잿빛 극장》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온다 리쿠. 일본에서 가장 대중성이 높고 권위 있는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는 온다 리쿠가 처음이다. 《잿빛 극장》은 온다 리쿠의 작품 중 최초로 실존 인물의 죽음을 파헤친 일명 '모델 소설'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을 선보인다. 작품 속 허구 세계가 작가 온다 리쿠의 현실과 연동되면서 중층의 서사를 이루고, 일상과 환상이 뒤섞이며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구조 속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익명의 존재가 절망에 이르는 과정을 촘촘하게 묘사한 문제작이다. (책날개 발췌)

* 오직 한국 팬들을 위해 준비한 온다 리쿠 친필 사인본!



이 책의 시작에는 '옮긴이의 말'이 먼저 나온다.

온다 리쿠.

미스터리, SF 판타지, 호러, 청춘물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써낼 뿐 아니라 일본 사상 최초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 수상한 작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작풍으로 독자를 사로잡아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하는 소설가. 명실공히 일본 대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온다 리쿠는 2021년 등단 30주년을 맞이하여 일흔 번째 소설 《잿빛 극장》을 선보였다. 문예 잡지 <분케이>에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장장 7년간 연재한 이야기를 묶었다. 그녀의 장편 소설 중 최초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구성부터 내용까지 이전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문제작이다. (4쪽)

온다 리쿠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옮긴이의 이야기에서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된다. 일흔 번째 소설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이전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문제작이라는 점을 알고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책은 구성을 간단하게 알고 읽기 시작하는 게 좋겠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이 작품을 읽으니 바로 작품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 설명이 없었다면 한참은 헤맸으리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0,(1),1로 구성되는데, 0은 《잿빛 극장》을 집필하는 '나'의 일상, (1)은 《잿빛 극장》을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과정, 1은 실존인물이자 작중 두 주인공인 'T'와 'M'이 대학에서 처음 만나 사회에 나오고 각자의 삶을 살다가 재회하여 중년에 이른 어느 날, 다리 위에서 함께 투신자살하기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현실과 허구가 연동되면서 전개되는 작품인데,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점점 경계가 흐려진다. 현실 의식이 강해질수록 허구 세계가 견고해진다. (5쪽)

이 정도의 정보는 미리 알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도 잘 몰랐던 내 소설 취향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바로 작품에 빠져들어 휘몰아치듯 몰입해서 읽어나가게 되는 소설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액자식 구성으로 소설 속 상상 부분과 현실 같은 소설 속 이야기가 교차되며 소설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혼란을 일으키는 작품도 좋아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뒤흔들다가 내동댕이치는 소설이 아니라, 강약을 조절하며 독자를 마음껏 끌고 다닌 후에 제자리에 앉혀놓는 느낌이랄까. 이 소설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소설 잘 읽었다'라는 생각을 하며 바로 일상에 들어가지만, 그 일상의 경계가 마구 흔들려 그제야 혼란스러운 그런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소재는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이지만, 단순히 신문기사 몇 줄의 사건으로 진작에 흘러가버린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로 만들어냈다. 단순한 사건 기사에 생명을 불어넣어 현실에 끌어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 그 이유에서인가 보다.

그것도 뚝딱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은근히 발효시켜 뭉근한 불로 달여서 조금씩 꺼내 보여주어 더욱 탄탄한 소설로 탄생시켰다. 소설가의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인가 보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알고 보니 더욱 생각할 거리가 풍성해진다.

온다 리쿠는 언제나 제목부터 정하고 나서 그 제목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그려나간다고 한다. 그러니 소설 《잿빛 극장》에서 가장 뚜렷한 실체는 잿빛이라는 그 색감, 그 이미지다. 'T'와 'M'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T'와 'M'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번민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단순히 잿빛이라는 빛깔을 싫어한다는 호불호로 다가가지 말고, 그 의미에 대한 사색은 이제부터 시작해 보아야겠다. 인간 심리의 기저로 들어가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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