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윤미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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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을 보자마자 특별하게 다가왔다. 헤르만 헤세와 음악이라니. 이 조합을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보자마자 '이건 읽어야 해!'라는 생각을 했다. 읽어보고 싶다는 것을 넘어서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감정 말이다. 읽기도 전에 이 책이 주는 첫인상이 폭풍이 몰아치는 듯 강렬했다.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애호가는 많지만 헤세만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누가 쇼팽을 이토록 내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리라. 헤세에게 음악은 찬란하게 펼쳐진 그림이고 영롱한 소리로 쓴 문학이었다. 이 책으로 그는 우리에게 시공을 뛰어넘어 그 감동적인 체험을 전한다."

_민은기 (서울대 음대 교수, 『음악과 페미니즘』, 『난처한 클래식 수업』 저자)

독일어판 편집자 후기에 의하면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글 중 음악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을 아우르는 최초의 시도라고 한다. 이 책이 지금까지 생각하던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리라 기대하며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헤르만 헤세. 소설가, 시인, 화가. 헤세는 음악 예술에 대한 애정이 특별히 깊었고, 그의 문학 세계에는 '악보 없는 음악'이라 불릴 정도로 깊게 음악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그가 일평생 음악에 대해 쓴 글을 묶어낸 책이다. 각각의 글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완성하는 한편, 헤세의 문학에 은은하게 일렁이는 음악의 그림자를 또렷한 시적 형체로 드러내준다. (책 속에서)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된다. 1부 '완전한 현재 안에서 숨 쉬기: 사색과 시', 2부 '이성과 마법이 하나되는 곳: 음악 체험, 작곡가와 연주자에 대한 편지, 소설, 일기, 서평, 시'로 나뉜다. 오르간 연주, 일요일 오후의 <마술피리>, 모차르트의 오페라들, <마술피리> 입장권을 들고, 슈만의 음악을 들으며, 화려한 왈츠, 어느 연주회의 휴식 시간, 나의 바이올린에게, 쇼팽, 사라사테, 보니파치오의 그림, 『유리알 유희』를 위한 작업 노트에서, 플루트 연주, 4월 밤에 쓰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초반부터 나를 휘감는다. 생생하게, 그리고 글자 속에서 음악의 선율을 느낄 수 있게 말이다. 내가 지금껏 삶에서 음악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리고 음악에 관해 그 어떤 책에서도 못 보았던 표현을 접하는 듯해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두근거렸다.

이때 오르간의 강렬한 고음이 울린다. 오르간 음은 점차 커지면서 어마어마한 공간을 채우더니 음 스스로가 공간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휘감는다. 음은 자라나 편안히 쉰다. 다른 음들이 합류한다. 별안간 모든 음이 다급히 도망치며 추락하고 몸을 숙여 경배하며, 문득 치솟다가 제지되어서는 조화로운 베이스 음 속에 꿈쩍 않고 머문다. 이제 음들은 침묵한다. 휴지부는 뇌우 전의 미풍처럼 홀안에 나부낀다. 장중한 음들이 다시 깊고 황홀한 열정으로 일어서더니 격정적으로 팽창하며, 소리 높여 헌신하는 자세로 신께 저들의 탄원을 부르짖는다. 그렇게 한 번 더. 더욱 통절히, 더욱 우람하게. 그러다 뚝 그친다. 음들이 다시 일어선다. 이 대담하고 무아경에 빠진 대가는 자신의 막강한 목소리를 신을 향해 들어올리며 애원하고 간구한다. 그의 노래는 음을 휘몰아치며 원 없이 펑펑 운다. 다시 고이 머물면서 몰입해 경외와 위엄의 성가로 신을 찬미하고, 높고 어스름한 곳에 황금빛 둥근 천장을 만들고, 둥근 기둥들과 소리의 다발 기둥들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자신의 경배로 성당을 지어 올린다. 마침내 성당이 완성되어 고요히 서 있다. 음이 다 사그라들었을 때도 성당은 여전히 고요히 서서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 (12~13쪽)

지금껏 나는 음악과 글을 따로 생각해왔다. 그런 나에게 이런 표현들은 새롭고 신비롭다. 음악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그 표현 속에 빠져든다.

이 책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 헤르만 헤세와 음악의 조합이 이 책을 특별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헤르만 헤세를 음악 안에서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헤르만 헤세는 음악에 대한 취향이 확실한 느낌이다.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해주며,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풍부한 표현력으로 듣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모든 과정에서의 들뜬 마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는 니논에게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 속삭였다. <숲의 정경>이 아니라 <다채로운 작품집>이라서 얼마나 아쉬운지. <숲의 정경>이 더 아름답다고 혹은 훨씬 더 좋다고. 슈만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소품 <예언하는 새>를 한 번, 아니 여러 번 더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연주회는 매우 좋았고 덕분에 자못 사적인 취향과 소망을 잊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은 기대 이상 행복했다. 열렬한 환호를 받은 예술가가 앙코르 곡을 선사했는데 오, 세상에, 다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예언하는 새>를 연주했던 것이다! (314쪽)

그리고 그 감상은 헤르만 헤세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사멸하고 침묵하게 될 많은 것을 긴 생애 내내 끌어안고 다니는 법이다. 슬픈 눈동자를 지닌 그 음악가가 죽은 지 거의 오십 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때론 가까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나도 <숲의 정경>의 소품 <예언하는 새>는 들을 때마다 슈만이 걸어둔 작품 고유의 마법을 넘어 기억을 불러들이는 샘이 되어준다. (314쪽)



우리 삶에 음악이 없다면! 꼭 연주회에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한 번의 피아노 소리면, 고마운 휘파람이나 노래나 흥얼거림이면 족하다. 아니면 잊을 수 없는 몇 마디를 소리 없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누군가 나나 그럭저럭 음악적이라 할 사람에게서 바흐의 성가곡을, <마술피리>나 <피가로의 결혼>의 아리아들을 빼앗고 금지하고 기억으로부터 떼어놓는다면,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몸의 장기 하나를 잃는 것과도 같을 것이며 감각 하나를 반쯤 또는 전부 상실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속수무책일 때, 하늘의 쪽빛과 총총한 별밤이 우리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할 때, 시인의 책조차 없을 때, 그럴 때 얼마나 자주 기억의 보물 창고에서 슈베르트 가곡 하나, 모차르트 한 소절, 미사곡과 소나타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이젠 알 수도 없는 그것들이- 울려와 환히 빛나며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처 위에 사랑의 약손을 얹어주는가… 아, 우리 삶에 음악이 없다면! (35쪽)

그동안 알던 세상에서 한 단계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책을 만나면 두근두근 설렌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해준다. 그동안 헤르만 헤세에 대한 생각이 문학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음악으로 뻗어나간다. 이 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을 읽으니 음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표현 하나하나가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듯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어서 아껴두고 꺼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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