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 사랑한 시, 나즘 히크메트 - 나즘 히크메트 시선집
나즘 히크메트 지음, 백석 옮김, 이난아 해설 / 태학사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시인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다면, 이 시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이 터키 혁명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 시 말고는 다른 시를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책을 보고 말았다. 그것도 백석이 옮긴 나즘 히크메트의 시선집이라고 해서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들여놓게 되었다. 터키 로맨티스트 혁명시인 나즘 히크메트의 국내 첫 시집 『백석이 사랑한 시, 나즘 히크메트』를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나즘 히크메트(1902~1963). 본명은 나즘 히크메트 란으로, 터키를 대표하는 혁명적 서정시인이다. 그는 몰락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현 그리스 땅 셀라니크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전 세계에 전파된 자유, 정의, 평등, 인권 등 새로운 사상의 영향 아래서,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터키 독립 전쟁에 동참하기 위해 아나톨리아의 이네볼루로 가던 중 헐벗고 굶주린 민중의 현실과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어서 독일에서 온 스파르타키스트 터키 청년들을 만나 러시아 10월 혁명 등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바꾸어 러시아로 떠난다. 러시아 '동양 근로자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했고, 러시아 시인 마야콥스키와 같은 무대에서 시 낭독을 한 것을 계기로 시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터키에서 체포와 구금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고, 1938년 '군대 반란 조장죄'로 28년 4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로써 일생 동안 총 55년의 형을 언도받고 실제로는 1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4년 국내외에서 나즘 히크메트 석방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힘입어 1950년 7월 일반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그는 파블로 피카소, 폴 로브슨, 반다 야쿠보프스카,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세계평화위원회가 수여하는 '국제평화상'을 수상했다. 1963년 긴 투옥 생활로 얻은 지병으로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그의 시집은 34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정작 터키에서는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사후에 출판되기 시작했다. 1951년 박탈되었던 그의 국적은 2009년 회복되었다. (책날개 중에서)

백석(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이 책에는 2부에 걸쳐 나즘 히크메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맨 앞에는 옮긴이의 말 '나즘 히크메트에 대하여/ 백석'으로 시작하며, 1부 '해를 마시는 사람들의 노래', 2부 '나의 감금 열두 번째 해가 감이여'로 이어지고, 해설 '민중을 사랑한, 반전과 평화를 외친 로맨티스트 혁명가 나즘 히크메트/이난아'로 마무리된다.

일러두기에 보면 이 시집은 1956년 평양 국립출판사에서 출판된 『나즴 히크메트 시선집』(백석·전창식·김병욱·허준 옮김) 중 백석이 옮긴 37편을 묶은 것으로, 편집자가 이를 2부로 나누고 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 책은 나즘 히크메트의 시만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훑어보고 나서 시를 읽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책을 읽으며 나즘 히크메트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도 나에게는 경이롭다.






시가 수록되어 있고, 그다음에는 발표 연대, 간단한 해설이 이어진다. 그 작품이 어디에서 씌어지고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주니 큰 틀에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실 대부분의 시가 난해하지만 어떤 시는 한 번에 뇌리에 남아있기도 한다. 옥중 서한 제19신 같은 경우 말이다.

옥중 서한

제19신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바다는 -

아직 지나가지 않은 바다.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아이는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세월은 -

아직 오지 않은 세월.

그대에게 내 말하고 싶은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말은 -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말.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했다면, 우리 모두는 나즘의 호흡에서 나왔다. 나즘 히크메트의 시를 반대하는 사람도, 모방하는 사람도, 그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 모두 나즘의 호흡을 취하고, 그를 호흡하면서 등장했다."

-아지즈 네신(터키 풍자 작가)

비록 이 책이 백석의 번역시가 다수 실려 있는 『나즴 히크메트 시선집』(1956, 평양 국립출판사)이 터키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시집이라는 점은 태생적 한계에 있는 것일 테다. 게다가 그 책을 또한 한글 맞춤법에 따라 수정하고 북한어는 현대 남한의 말로 바꾸었으니 나즘 히크메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에게까지 잘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그의 시의 세계도 난해하지만 이번 기회에 정독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특히 그의 생을 함께 들려주어서 단순히 시의 언어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큰 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종종 꺼내들어 감상의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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