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은 8개월 전 미끄러져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일행은 없었다. R은 떨어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맨정신이었다. R은 뒤틀린 자기 발목과 찢겨 벌어진 피부를 보았다. …… R이 또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 그의 위에 해가 높이 떠 있었다. R은 누워 해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뜨거운 게 얼굴인지 등인지, 발목인지. 해와, 이 바닥에 감사하자, R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감사함은 또 다른 착란이었다. (11쪽)
R에게 사고가 났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는 분명 멀쩡한 것 같은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 말이다. 술에 취했든 사고가 났든, 많이 아프던 순간이든,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은 있을 것이다.
누가 구해줬어요? 아내가 물었다.
어디에 가던 길이었어요?
약속이 있었나요?
혼자 있었나요?
다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뭐예요? (12쪽)
R의 기억은 조각나버렸다. R의 기억은 맥락 없이, 맥없이. 이어지지 않는 낱장의 그림처럼, 떠오르는 대로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야 했다. 소설은 사색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R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생각의 틀이 뻗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