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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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 향 시리즈 중 한 권인 김엄지 소설 『겨울장면』이다. 작가정신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소설 시리즈로,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지금까지 김사과 0 영 ZERO 零, 윤이형 붕대감기, 김이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 이어 네 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김엄지.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돼지우리」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중편소설 『폭죽무덤』,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등이 있다. (책속에서)



기억과 망각 사이를 유영하는

R, 그리고 R, 그리고 ……

우리, 수많은 R

아, 이 소설. 뒤표지에 있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만 해도 무슨 의미일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본문을 읽어나가자마자 이 말이 엄청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이다. 이 문장을 설명해주기 위해, 우리에게 와닿게 풀어내기 위해 이 소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R은 8개월 전 미끄러져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일행은 없었다. R은 떨어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맨정신이었다. R은 뒤틀린 자기 발목과 찢겨 벌어진 피부를 보았다. …… R이 또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 그의 위에 해가 높이 떠 있었다. R은 누워 해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뜨거운 게 얼굴인지 등인지, 발목인지. 해와, 이 바닥에 감사하자, R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감사함은 또 다른 착란이었다. (11쪽)

R에게 사고가 났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는 분명 멀쩡한 것 같은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 말이다. 술에 취했든 사고가 났든, 많이 아프던 순간이든,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은 있을 것이다.

누가 구해줬어요? 아내가 물었다.

어디에 가던 길이었어요?

약속이 있었나요?

혼자 있었나요?

다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뭐예요? (12쪽)

R의 기억은 조각나버렸다. R의 기억은 맥락 없이, 맥없이. 이어지지 않는 낱장의 그림처럼, 떠오르는 대로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야 했다. 소설은 사색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R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생각의 틀이 뻗어나간다.

R은,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14쪽)




김엄지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첫인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다. 보통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그 소설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고 마음에 담곤 했는데, 이 책은 처음 몇 페이지에서 내 마음이 결정되었다. 글에 푹 들어가서 내가 R인지, R이 나인지 모르게 혼란 속에 빠져들며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글을 정갈하게 아껴 단출하게 담아냈는데 이 점도 마음에 든다. 때로는 말 없는 친구가 한 마디 툭 건넬 때 그걸로 아이디어도 얻고 삶의 길도 찾고 그럴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런 느낌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가 머릿속에서 이 책 두께의 두세 배는 글을 써나가는 느낌이랄까. 이 느낌이 좋다. 결국은 소설을 읽는 내 머릿속에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니 말이다. 짧고 굵직하지만 나에게 '겨울'과 함께 한동안 남아있을 소설이다.






겨울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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