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주제 사라마구 장편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스페셜 에디션이다. 이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와 함께 떠오르는 책이니 그와 함께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옮긴이도 말한다. 이 책은 『눈먼 자들의 도시』의 4년 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일단 비슷한 제목에서 뭔가 궁금해지다가, 4년 후의 이야기라고 하니 호기심이 급상승한다.

그 일이 일어난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무언가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만, 사실 어쩌면 별다른 노력을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작가는 어떻게 상상을 했을까. 옮긴이에 의하면 이 도시에서는 도시의 모든 주민이 눈이 멀어(사실 한 여자는 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도시가 생지옥으로 변했던 사실을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에게 수치였던 그 일을 두고 침묵의 협정이라고 맺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4년이 지나면서 다시 그 일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출발점부터 이 책을 어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세상의 모든 눈뜬 자들이여,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주제 사라마구. 1922년 포르투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라마구는 1947년 『죄악의 땅』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19년간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고 공산당 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968년 시집 『가능한 시』를 펴낸 후에야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사라마구 문학의 전성기를 연 작품은 1982년작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유럽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으며 199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10년 여든일곱의 나이로 타계했다. (책날개 중에서)



선거일 투표소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제부터 비가 쉬지 않고 오는 걸 보니 기권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라며 걱정이다. 하지만 비는 그쳤고 4시 이후에는 투표자 수가 많아졌으며, 자정이 지나서야 개표가 끝났다. 그러나 유효표 숫자는 25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전체 표의 70퍼센트 이상이 모두 백지였던 것이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 수도에서 실시된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익정당 8퍼센트, 중도정당 8퍼센트, 좌익정당 1퍼센트, 기권 없음, 무효표 없음, 백지투표 83퍼센트. 총리는 말을 끊고 옆에 있던 잔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오늘의 투표가 지난 일요일에 드러난 경향의 확인인 동시에 악화임을 알기 때문에, 이 곤혹스러운 결과의 모든 원인을 진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44쪽)



저자는 1922년생으로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당시가 2007년이다. 그 당시 이미 여든이 훨씬 넘었다지만 그런 느낌이 소설 속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소설에는 대화에 당연시되는 따옴표조차 없다. 글자 자체로는 가독성이 뛰어나지 않은데, 내용은 놓치기 싫어서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 본성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 차근히 바라보며 읽어나간다.

선거인 100명당 83명이 백지를 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백지 몇 장 나온 것이라고 할까, 하나의 현상인 것인가. 투표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또?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지금껏 없었던 그 도시의 백지 사건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가며 읽어나간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지하기 힘든 정도였지만 곧 누구나 느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방법으로 그 말을 피해 가거나 에둘러갔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는 빈 종이라고 불렀고, 얼굴이 백지장 같다는 표현은 그냥 얼굴이 창백하다고 표현해버렸으며, 액수가 적히지 않은 수표는 백지수표가 아니라 자유수표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문제에 대해 백지상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주제에 대해 모른다고 말해버렸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부모, 조부모, 숙모, 숙부, 이웃이 어린아이들의 지력과 연역력을 자극하려고 내던 수수께끼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채울 수 있지, 내 위에 그릴 수도 있지, 나한테 불을 붙일 수도 있지, 자,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순진한 아이들에게서 백지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 망설여지자, 이 수수께끼가 세상 경험이 제한된 아이들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말로 없애는 것을 정당화해버렸다. (67쪽)

이들은 거짓말 탐지기를 활용해 진실을 파악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한 일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불꽃 튀는 설전이 벌어지지만, 이 책의 띠지에도 발췌되어 있는 문장이면서 본문 중에 있는 이 말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바로 장관님처럼, 바로 댁처럼 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댁한테 나하고 같이 자고 싶으냐고 물었다면 댁은 뭐라고 말했겠어요, 저 기계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75쪽)



처음 투표소 광경이 나올 때만 해도 이런 심정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게 이럴 일이야?'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소설 속 세상은 생각보다 총체적 난국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이라고 다를 게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때로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지 않은가. 거기에서 나의 머릿속은 이곳저곳, 이 광경 저 광경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풍성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역시 소설의 완성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두둥, 나를 멈칫 멈춰 세운다. 햐, 이렇게 마무리를 하신다?! 어쩌면 마무리는 소설가가 아닌 소설 속 인물들이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무어라 판단하기도 애매한, 그냥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 이렇게 흘러간 것처럼, 묘한 생각이 스며들어서 생각이 많아진다. 다음에, 시간이 좀 더 지난 어느 날,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다시 읽을 책 목록으로 뽑아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