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 기록이다. 특히 이 문장을 보고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다가올 인생의 변화를 예감하며 떠난 여행'이라는 것 말이다. 여행을 하지 말아야 하니 여행이 더 그립고, 책을 읽으며 그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특히 소설가의 여행 이야기는 더 풍성한 문장으로 다가와 나를 뒤흔들어놓으리라 기대되어 이 책을 읽고야 말았다. '언젠가 시칠리아에서 길을 잃을 당신에게'라는 프롤로그의 제목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김영하.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이 있다. 여행에 관한 사유를 담은 산문 『여행의 이유』를 냈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책날개 발췌)

인생은 길지 않다. 과거에 쓴 책을 보면 더욱 그렇다. 쓸 때의 느낌은 아직 생생한데 판권면을 들춰보면 그게 벌써 십 년 전이고 십오년 전이다. 그런 책들은 마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로 보내온 메시지 같다. (9쪽)

저자는 이 여행이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이라고 언급한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젊었다, 그리고(아니 그래서), 겁이 없었다'(10쪽)는 이 말에 쿵, 마음이 아려온다.

시칠리아 여행까지 착착 진행되는 과정을 보니 내가 다 두근거린다. 어쩌면 평생을 뛰던 가슴도 멈추어버린 듯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다 그만두고 소설 써'라고 이야기하는 아내가 있다니 얼마나 좋겠는가. 게다가 단 한 번도 시칠리아에 가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 없었다니, 그또한 흥미롭다. 그곳은 <대부>의 돈 코를레오네의 고향이고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며,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살고 있으며 거친 사내들이 배를 타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러 떠나는 곳이다. 팔레르모라는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것, 평론가 김현이 90년대에 『시칠리아의 암소』라는 평론집을 냈다는 것 정도가 그 섬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시칠리아에 가게 되었고, 이 책도 그래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글과 사진을 보면서 시칠리아 여행을 상상해본다. 어슬렁거리며 그곳을 돌아다니는 듯, 이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의 시간을 보낸다. 낯선 곳을 하나씩 알아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여행 이야기를 채운다. 때로는 역사적인 설명에,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주는 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집중해본다.

 



영어로는 '기억상실' 혹은 '잃어버린 기억' 정도로 읽힐 그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296쪽)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정말 여행을 좋아했던 것인지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나는 서서히 변해버렸던 것이다. 무언가 익숙한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었나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이 책은 김영하 작가의 2007년 여행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몰입도가 뛰어난 책이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언젠가 시칠리아에 가게 된다면 마음껏 길을 잃어야겠다. 스마트폰을 꺼두고 종이지도 한 장 들고, 그렇게 예전에 내가 여행하던 것처럼 그곳도 바라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