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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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단숨에 이 책으로 끌어당긴 데에는 「그 쇳물 쓰지마라」는 시 한 편이면 충분했다. 찌르르 전율을 느끼며 저절로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쇳물 쓰지 마라.

댓글시인 제페토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출처) 나무위키

'댓글시인'이라는 점이 독특했다. 제페토 시인은 익명으로 뉴스 댓글로만 활동하는 시인이다. 그리고 이 책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뉴스 기사에 실린 시를 모아 엮은 것이다. 무언가 글의 힘을 느끼며 이 책에 손을 뻗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댓글 시인 제페토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제페토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누리꾼이다. 인터넷 뉴스를 읽고 시 형식의 댓글을 쓴다. (책날개 발췌)

살아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다.

울 수 있다면

웃을 수도 있으리라는. (198쪽, 좋은 날 중에서)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남아나지 않는 인연이 섧다 2015~2018', 2부 '우리는 미화되었다 2018~2020', 3부 '그리운 것은 다들 멀리에 있다'로 나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를 읽고 충격받고 분노하고 잊어버린다. 이 책에 담긴 어느 날의 기사와 시를 읽어나가며 울컥한 것은 우리네 삶이 아름다운 것으로만 채워지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일, 우리사회의 얼룩 같은 사건 마저도 삭제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타산지석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글의 힘, 댓글에도 담길 수 있는 힘을 느끼게 한다.



 

암울하고 어두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건사고 말고도 계절에 따른 자연 풍광도 잊기 쉬운데, 그것 또한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잡아끌어 댓글로 녹여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양한 사건사고와 댓글시인 제페토의 글을 보면서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뉴스는 왼쪽 페이지에 실려있다. 예를 들면 84페이지에 2019년 11월 18일 기사가 먼저 눈에 띈다.

지리산 산청 곶감 말리기 작업 한창

18일 곶감 주산지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의 한 농가에서 곶감 말리기 작업이 한창이다. 곶감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질 때 말리는 작업을 진행해야 가장 품질 좋은 곶감이 만들어지는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맛깔스러운 곶감으로 변신한다. (152쪽)

오른쪽 페이지에는 댓글시인 제페토의 짧은 시가 담겨 있다.

북어보다는

곶감처럼 늙고 싶다.

노을처럼 붉다가

저물어 어둑해진 후에도

자꾸만 손이 가는 추억이 되고 싶다.

사는 맛을 알지 못해

울기만 하는 당신을 위해

당도 높은 기쁨으로

속을 채워두고 싶다

껍데기를 버리고

해 드는 거실에 마주 앉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겨울날

당신은 입가를 훔치고 말하리라.

산다는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

<곶감처럼>

153쪽



이 책을 읽다보면 글들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이다. 울컥하다 포근하다 잔잔히 스며든다. 뉴스를 보며, 때로는 너무 무감각한 나 자신을 본다. 특히 어떤 때에는 정말 잔혹한 뉴스를 보면서도 금세 잊고 깔깔거리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하는데, 이 속에 담긴 사건사고들을 보고 제페토의 댓글시를 함께 읽으며 같이 반성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보낸다. 무언가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던 일들을 이 책이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지난 세월을 뭉뚱그려 생각해본다. 특히 누군가를 콕콕 찔러가며 상처를 주고 죽음까지 내몬 댓글들을 보며 댓글의 부작용을 크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내게 있어 댓글은 손쉬운 유희가 아닌,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목소리가 된 셈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맴돈다. 많은 이들이 그와 같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 숨쉬는 생명체 같은 댓글시들을 마음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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