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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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이설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다. '필사'에 대해 생각해본다. 필사는 글을 꾹꾹 눌러 마음에 담는 과정이다. 문득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문장을 갈망하면서도 마음에 와 박히는 문장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지금의 내가 보인다. 내 인생의 통과의례를 지독하게 겪으며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 말고 필사를 하며 견뎌내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생각이 많아지는 가을날, 이 책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 향'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작가정신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소설 시리즈로,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향'이 가진 다양한 의미처럼 소설 한 편 한 편이 누군가에는 즐거움이자 위로로, 때로는 성찰이자 반성으로 서술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책 속에서)

이 책의 저자는 김이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등이 있다.

이 책에는 '우리의 정류장, 목련빌라, 필사의 밤,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여름 그림자, 시인의 밤'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구병모의 '우리의 문장을 싣고 달리자'와 작가의 말로 마무리 된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의 인생도 그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자신만의 묵직한 무언가를 견뎌내야 하니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답답하고 소심하고 자신감마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삶의 크고 작은 시련을 견뎌내는 도구로 '시를 필사하는 것'을 이용하고 있다. 꿋꿋이 살아나가게 하는 힘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중에 결과는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은 일단 보류다. 불안하고 힘들고 지칠수록 일단 지금은 시를 골라 노트에 필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걱정은 아무 도움이 안 되니 말이다.



책상 앞에 앉을 엄두도 못 내던 근 1년 동안 시를 쓰기는커녕, 시 한 편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필사도 마찬가지였다. 둘째가 돌이 지나고 나서야, 밤에 통잠을 자기 시작한 이후에야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책상이 있는 내 방에선 동생이 자야 했으므로 이제 나의 책상은 식탁이 되어버렸다. 다시 시를 읽고 다시 필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가 써지지 않았다. 그 한 해가, 아무것도 읽고 쓰지 못했던 그 1년 때문에 먹통이 돼버렸다. 머리도 마음도 그저 텅 빈 것처럼 깜깜할 뿐이었다. (79쪽)

시 쓰는 여자

이선영

시를 쓰기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이불을 깔았다 개고 걸레질을 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밥을 안치는 여자

(……)

뒤숭숭한 세간들 사이로 시만 실뱀처럼 빠져나간 여자

꽉 차 있으나 늘 텅 비어 있는 여자

이선영, 「시 쓰는 여자」 부분, 『60조각의 비가』, 민음사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이 소설을 읽는 여성들 중에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며 울컥한 독자가 많으리라 생각된다. 늦은 줄 알고 출발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자책에 시달리거나, 현실적인 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어버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는 것 말이다.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에 울컥하며 방황하는 것이 인생인가보다.



저자의 말에 이런 글이 있다.

매일 시집을 읽던 나날이 있었다. 내 안의 언어가 전부 소멸해 아무것도 쓸 수 없던 시절. 이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리라는 절망에 빠졌던 때였다. 그건 나를 잃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무수한 필사의 밤을 보내고서야, 소설이 아니라 시를 만나고서야,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말을 배우는 어린애처럼, 처음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한 마디씩, 한 글자씩 다시 써나갔다. 소설 속 인물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곤란한 일을 헤쳐나간 것처럼, 때론 미련하게 참았지만 끝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던 것처럼, 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1~192쪽)

요즘 내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무언가 나의 언어를 풍부하게 해주는 책을 읽고 감상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고 하루는 너무 짧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 소설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의 지독한 현실과 더불어 돌파구인 '시 필사'를 알려주는 듯하다. 이또한 저자 자신이 언어의 소멸, 절망을 딛고 일어나서 그 소재를 소설에 끌어다 썼으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번에야말로 안 되면 던지자, 같은 불가능한 결심만 10년 넘게 반복하던 시절의 나를 오려내다 거기 갖다붙인 줄 알았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속에 나타난 여성의 숨막히고 진저리 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몇몇 문장과 장면에서 눈길이 멈출 때마다, 잊은 척했던 환멸이 속에서 치받쳐 오른다. 그런 상태를 감내하고 통과해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감각이다. (181쪽)

'그런 상태를 감내하고 통과해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감각'이라는 소설가 구병모의 글에 공감한다. 특히 그 감각을 아는 독자에게 동질감과 뭉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펜과 노트를 꺼내들도록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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