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예전에 한번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미술관 박물관 가지 않기'를 여행 테마로 잡은 적이 있다. 예술 작품이나 고대 문물을 잘 모르니 굳이 열심히 돌아다니더라도 나에게 별 감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바에는 그냥 길을 거닐다가 지금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생각해보니 사는 데에 너무 지친 때였기에 일가견이 전혀 없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정적인 곳보다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갈 때마다 미술관 박물관에 안 간 것이 아니라, 여러 여행 중 딱 한 번 그런 테마로 돌아다닌 적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다.

이 책은 무언가 신비로운 표지 그림이 시선을 이끈다. 별자리도 달도 보인다. 우주를 품은 듯한 유물이다. 몇 천 년 세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고 있을 듯한 모양새다. 그런데 이 '침묵 박물관'이 무엇인고 하니 한때 이 세상에 존재했던 죽은 자들의 유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그 설정부터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무언가 일어날 것 같고, 나는 그것을 지켜볼 것 같은 예감 말이다. 그렇게 이 책 『침묵 박물관』에 초대받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의 저자는 오가와 요코. 투명하리만치 섬세한 문체, 무국적성을 띤 장소, 현실성이 결여된 몽환적인 분위기, 그 속에서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자신의 본분과 열정 속으로 침잠하는 인물들은 오가와 요코 작품 세계의 핵심이다. 『침묵 박물관』은 이러한 오가와 요코의 미학이 아름다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하게 피어난 작품으로, 육신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생생한 증거이자 죽음 이전의 열망이 온전히 재현된 유품을 보존하려는 박물관을 배경으로 한다. 작은 마을에서 불가사의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잇따른 죽음 가운데서 '생生의 본질적 증거'로서의 유품을 수집하는 데 점차 집착하게 되는 인물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며 오가와 요코 작품의 정수를 선사한다. (책날개 발췌)



'내가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였다. 내용물은 옷 몇 벌, 손에 익은 필기도구, 면도기 세트, 현미경 그리고 『안네의 일기』와 『박물관학』이라는 책 두 권이 전부였다.(5쪽)'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나도 주인공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듯 금세 소설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아무 연고도 없고 이름조차 생소한 기차역에서 한번 내려서 돌아다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작은 마을이어서 볼 것이 없다고 해도 어쩌면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내 삶에 훅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느낌이었다. 얼떨결에 새로운 마을에 입성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거기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사실 이왕 읽는 소설이라면 아예 '이 책은 소설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몽환적인 느낌,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인지, 내 빈약한 상상력을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이소설에서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는 노파의 캐릭터도 신비감을 더한다. 도대체 무슨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져 계속 읽어나간다.

어떤 종류의 공간이든 수장고는 나에게 친숙한 곳이다. 관람객은 들어올 수 없는 그 고요한 방에 혼자 틀어박혀 사료와 마주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그곳은 내가 가본 그 어떤 수장고와도 달랐다. 수장품 하나하나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참기 어려운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수장고라고 해도 같은 박물관에 수집된 물건들 간에는 어떤 연대 의식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일말의 유대감도, 단합도 없었다. 주변을 살피는 배려심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물레, 금니, 장갑, 그림 붓, 등산화, 거품기, 석고 붕대, 요람…….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유품이야." 노파가 말했다. "전부 마을 사람들의 유품이지." "이걸 전시하고, 보존하는 박물관을 만들어주었으면 해." (45쪽)

노파가 열한 살 되던 해 가을부터 모았다고 한다. 계산하기 귀찮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수집할 거란다. 마을에서 누가 죽을 때마다 그 사람과 관련된 물건을 하나씩 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파가 모으는 물건은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다. 그게 없으면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그 무엇,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여기에서부터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들어 읽어나갔다.

박물관이라는 공간, 거기에 이 세상에 존재했던 자의 유품을 전시한다니, 그 발상이 신선하다. 유품 하나하나마다 엄청난 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 풀어내도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소설. 거기에 무슨 '사건'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소설'이다. 작가는 매력적인 소재를 탄탄하게 구성해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게 만든다.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한번 발 담그면 중간에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함께 내달려야 한다. 100m 달리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완전 전력질주로 말이다. 끝까지 가게 되고, 나름의 반전도 맞닥뜨리면서 "좋은 경주였어."라며 뿌듯했다. 소재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소설이면서 처음 만나보는 낯선 마을을 여행하고 온 듯 신선하다. 그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 따뜻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닌 '사건'이어서 으스스한 매력이 더해진다. 책을 열 때만해도 예측하지 못한 독특하고 신비한 세계가 활짝 펼쳐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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