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고독감이 있다. 힘들고 우울할 때, 나를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생각, 그것은 바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소외감 아닐까. 소설가 임재희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세상을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삶에 의미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고독하고 고독하지만 나만 고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생각이 많아지는 그런 날, 이 시간에 어울리는 소설을 만났다. 오늘이 바로 이 책『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를 읽기에 좋은 날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임재희. 이 책은 경계인과 주변인의 실존적 고독감을
그린 임재희의 애도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히어 앤 데어, 동국, 라스트 북스토어, 천천히 초록, 로사의 연못, 분홍에 대하여, 압시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로드 등 총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아홉 편의 소설들은 떠나오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다시 돌아와 마주친 혼돈에 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당신이 모르는 '나'도 있고 내가 모르는 '당신'도 있다. 낯설고도 익숙한 내 안의 타인들이라고 그들을 명명한다면 나는 그들을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초대해 내 마음의 팔을 있는 힘껏 뻗어 포옹했다. (270쪽)
첫 작품 <히어 앤 데어>부터 생각에 빠져들며 읽어나갔다. 소설을 읽을 때 속이
시끄러운 경우가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라는 느낌이 들어 공감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맞아, 맞아', '그런 느낌일까', '나도
비슷한 느낌이었어' 등등 완전히 똑같은 상황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비슷해서 할 말이 많은 경우가 있다. 이 작품에서 동희는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아서 한국 국적과 미국 시민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엇비슷한 상황이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언젠가 하나는 정리해야 하는 애매모호 불투명한 미적지근한 위치…. 작가는 경계인과 주변인의 실존적 고독감을 담담한 필체로 무심코
툭 던지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읽다보면 지인 누군가의 이야기, 아니면 건너건너 알게 된 사람의 사소한 이야기같으면서도 그 무게감이 두둑하게 치고
들어와 나와 묘하게도 겹친다.


이 책으로 '경계인과 주변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씩 짚어보며, 나 또한 함께 애도하는 느낌으로
읽어나간다. 특히 작가의 말을 보며 <압시드> 소설의 탄생 일화를 들으니 작품이 더욱 인상적으로 남는다.
언젠가 아들은 내게 압(Ab)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 애기를 들려주었다. 이민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에이브러햄(Abraham)이라고 다 쓰지 못해 결국 압(Ab)이라고
적었다고 했다. 그때 내 안에서 소설「압시드」는 이미 반이 만들어졌고 그날 밤 나는 어떤 격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단숨에 초고를 써내려갔다.
압시드는 네 개의 알파벳(Abcd)으로 지은 소년의 이름이며 내 소설의 언어가 발화된 지점의 지명이기도 하다.「압시드」는 내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채 떠돌던 많은 이야기를 불러내었으니 이 소설집의 산파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270쪽)
소설을 읽을 때에 장편 소설보다 단편 소설집이 마음에 들어오기 더 어렵다. 첫 작품이 제대로
빗장을 풀어주어야 하고, 작품의 강약이 골고루 나뉘어 끝까지 끌고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첫 작품이 너무 강렬해도 다음 작품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면 김빠진 사이다처럼 흐물흐물거리며 기대감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작품이 너무 비슷하거나 완전히 달라져도 독서를 멈춰버리는 계기가
된다. 시기적절한 소재도 집중해서 읽는 데에 한 몫 하는데, 이 소설집은 적절히 모든 것이 어우러진 느낌이다. '애도 소설집'인 만큼 아홉
작품들이 모아놓고 제를 지내는 듯한 느낌으로 실존적 고독감을 곱씹어보는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