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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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자생적이고 감동적인 모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침몰하는 그리스도교라는 배에 남은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한 종교나 종파에 속한 종교적 인간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영적인 인간이라고 정의한다.(17-18쪽)·······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스스로에게 맡겨진 미션을 찾도록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위대한 질문과 삶을 통해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찾아야 한다. 예수는 묻는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30쪽)


사람에게 이름을 포함한 호칭은 단순한 외적 식별 도구를 넘어 인격과 삶의 지표로 기능합니다. 많은 경우, 사회적 지위나 평가를 담고 있음 또한 물론입니다. 한의사 호칭 문제가 그렇습니다. 일제가 식민지 시절 폄하하고 왜곡한 것을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전통 의학을 제도 밖으로 축출하면서 서구의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만 의사라는 보편 명칭을 부여하였습니다. 독립국가가 된 뒤에도 정치권력은 전통의학을 공적 의료체계의 근간으로 삼기는커녕 식민지 시대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려 했습니다. 조헌영 등 몇몇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전통의학의 명맥을 살려 놓았습니다. 그 전통의학을 한의학이라 하고 그 의사를 한의사라 이름 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의학이 의학이고 한의사가 의사입니다. 서구의학은 양의학이고 그 의사는 양의사입니다. 이 전도된 현실에서 오늘날 양의사들은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대중도 거의 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한의사인 저는 뒤에서 오거리 침쟁이로 불리기도 하고 앞에서 아저씨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의사라는 이름은 치욕으로 푸릅니다.(손택수 <나무의 수사학Ⅰ> 마지막 구절 ‘치욕으로 푸르다’에서 빌려 온 표현임.)


한의사의 치욕과는 전혀 달리 이 땅에서 스스로의 행실로써 자기 이름을 치욕스럽게 한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교입니다. 한자어로 기독교라 하니 그 이름만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치욕이 되었고 심지어 개독교라 불리기까지 합니다. 물론 개신교를 말합니다. 목사는 먹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들이 뭘 어쨌기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저자의 증언은 부드럽고 점잖습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이 부드럽고 점잖은 표현 훨씬 밖에서 준동하고 있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4개가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신교의 타락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대형교회들이 대한민국에 끼치고 있는 악영향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 교회 목사들이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 민족을 깨우치려고 하나님이 세월호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야당 후보 찍으면 빨갱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


윤리, 자비는 고사하고 교리조차 아닌 이 망발 앞에 머리 조아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세월호사건 희생자 유가족에게 그만하라 비아냥거리고, 눈 딱 감고 오로지 기호 1번 찍어 식민지 상태를 공고히 하고, 십일조 내어 개독교 먹사의 곳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요? 지금 상태라면 이들은 예외 없이 그 질문한 존재를 알아보지 못 할 것입니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굳게 믿는 이 기막힌 현실에서 우리는 영성을 상실하고 멸망해가는 한 종교의 운명을 예감합니다.


비단 개신교뿐이 아닙니다. 불교 조계종도 불성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승려들이 돈 선거를 하고, 외국 원정 도박을 즐기고, 총무원 지하방에서 폭력을 일삼습니다. 아마도 이른바 고등종교들의 이런 현상은 세계적일 것입니다. 바야흐로 “한 종교나 종파에 속한 종교적 인간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영적인 인간”이 일어나 기성 종교를 무너뜨리고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처 없는 불교도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부처인 평범한 사람들이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으로 고요히 겸손히 일상의 혁명을 일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귀 밝은 한 사람은 반드시 이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대답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유예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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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花益淨地水染

百姓益善權金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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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수록 인간은 존재의 초월적 근원을 찾습니다. 인간의 초월적 근원은 무슨 통속한 신이나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힘겹게 사는 인간에게 초월적 근원은 다름 아닌 버림받은 사람들, 무엇보다 세월호사건 희생자와 그 가족입니다. 이들을 찾아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이려면.


* 23일 자정까지 참여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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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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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여러 날 동안 아주 천천히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배철현이 쓴 『인간의 위대한 질문』과 『신의 위대한 질문』입니다. 전자는 신약성서, 후자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관건적 질문들을 토대로 오늘 여기에 필요한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 모색한 책입니다.


일단 질문으로 전체의 얼개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통속 기독교의 멱살을 움켜쥐는 도발입니다. 무엇보다 그 질문의 내용들을 치밀한 문헌비평으로 고증함으로써 의도된 무지와 오류를 걷어내어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기독교 영성의 따귀를 후려갈기는 순간순간이야말로 통쾌무비 그 자체입니다.


저자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성직자는 더욱 아닙니다. 그는 고전문헌학자입니다. 이 빼어난 고전을 기독교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시종 차분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삶의 중대한 길목에서 진지하게 신학을 공부했고 성직의 도상에 있다가 돌아선 저로서는 그처럼 차분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떤 회한이 통렬하게 들이닥쳤고, 또 한편으로는 같은 결의 트임이 빚어내는 공현 때문에 영혼이 통째 웅웅거렸습니다. 두 책을 모두 읽고 생각들을 다듬던 중 테리 이글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출구를 잃은 급진적 충동들이 이동해 간 곳 중 하나가 하필이면 신학이다. 오늘날 신학의 몇몇 영역에서는 들뢰즈와 비디우, 푸코와 페미니즘,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등을 거론하는 매우 세련되고 활기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런 현상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신학이 주장하는 진리들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많다 해도, 끊임없이 전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야심찬 이론적 영역의 하나가 바로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분석철학이나 정치학에서는 제기하기 어려운 의문들이다.·······신학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문젯거리로 점점 더 여겨지는 세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해답을 찾는 데 비판적 사고를 진작하는 것 역시 신학이다.(『신을 옹호하다』215-216쪽)


물론 여기 신학은 통속한 주류 기독교 신학이 아닙니다. 테리 이글턴의 표현대로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맥락에서 당면한 위기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결곡 곡진한 사유 운동을 말합니다. 교리에 터한 신념의 체계는 저 초월적 근원, 그러니까 광활함의 맥락에 가 닿지 못하므로 신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학이 해답을 찾는 데 비판적 사고를 진작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 근원, 광활함의 맥락에서 사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초월적 근원, 광활함의 맥락이란 “구원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문제다. 놀랍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종교라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통하여 구원받는다.”(『신을 옹호하다』33쪽)라는 진리의 역동적 산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으로써 배철현 이상의 날카롭고 옹골찬 질문을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철현 이상으로 날카롭고 옹골찬 회의를 품어 안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통속한 기독교 신봉자를 향한 요청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인류에게 주어진 귀중한 선물임을 알아차린 트인 영혼의 사람에게 보내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입니다. 법학도에서 신학도로, 다시 신학도에서 의학도로 생의 길을 바꾸는 과정에서 제가 짊어져야 했던 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60년을 걸어 이제 이 모든 사유와 실천의 통섭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흔히 법학·신학·의학을 3대 신성학문이라 합니다. 그 신성이란 말 앞에 정색하고 정좌합니다. 버려진 사람들을 향한 발걸음 없이, 그들이 왜 버려졌는지에 대한 물음 없이 살 수 없는 삶이 신성한 삶입니다. 그 신성한 삶을 기록한 성서, 그 성서를 질문에 담아 극진히 성찰한 배철현의 발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썼을까, 궁금하긴 한데 그다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제 삶의 결에 맞추어 먼저 『인간의 위대한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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