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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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다. 온라인 독서토론의 책이 아니었다면 사지도 않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한참 몰랐을 도서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추도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문익환 목사였다.

 

처음에는 문학가인 이 책의 저자의 문체가 너무 화려하고 문익환 목사에 대한 찬양이 지나친 것 같아, 문익환이라는 분을 잘 만나고 알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제가 산 시대(1987년 이후)에 일이나 사건들 속에서 문익환 목사님도 계시다는 것을 떠올렸다. 겹치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떤 사람들이 통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저에게도 조금 더 친숙해졌다. 그래서, 며칠 만에 수백여 쪽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이 분의 삶 전체에 흐르는 슬픔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북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찬란함과 달리 성장하면서 청년기 이후에 겪은 일제 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가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살았다고 나오는데, 맨 뒤에 연표를 보니 예례미아 선지자에 대한 연구와 묵상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아에 특히 동화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레미아도 이스라엘(히브리) 민족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경험하며 애통해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문익환 목사님은 모세처럼 늦은 나이(?)59세 때인 19763.1 구국선언으로 역사의 중심부에 등장한다. 어찌보면 대기만성이지만, 온전히 준비된 후 등장하게 된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이 더 지혜롭고 용감하다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박용길 여사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의 재판이나 옥바라지 투쟁이 그 예이다.

 

김형수 작가의 눈으로 문익환 목사님을 보니, 말씀이 바탕이 된 꿈을 가지고 민족주의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산 분이며, 작가의 말처럼 고구려 유목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말년에는 통일 운동에 온 삶을 쏟으신다. 그래서, 작가는 전반적으로 목사님에 대한 찬사가 넘쳐나도록 쓴 것 같다.

 

그러나, 700쪽이라는 많은 분량임에도 이 분을 온전히 알았다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목사님도 자신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신 경우가 많기에 더 그렇다. 작가도 문익환 목사님이 목자보다는 양들처럼 사셨다고 하지 않는가? 신앙이 있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나 작은 자들에게 배타적이지 않았기에 장례식 때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상여를 따랐으리라. ,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의 삶과 아야기를 다 기록하려면 하늘과 바닷물을 다 써도 기록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의 작가도 온전히 쓰지 못하고 남겨 둔 자료도 많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급하게 서평을 쓰는 이유도 다 정리하고 쓰려면 못 쓸 것 같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기록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수정하거나 추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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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장풍
최영희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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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순한 공상과학 아동·청소년 동화나 소설이라 생각했다. 최배달도 등장하기에 무협지의 기운(?)도 느껴진다. 읽어가면서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청소년이나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이루고자하는 꿈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나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차가운 수치와 기호로 이루어진 데이터로만 분석하고 결정하고 만드는 지적 설계자들의 세계와 이들이 만든 시뮬레이션 지구의 따스한 심장을 가진 무작위성(자유의지)의 지성체인 인간 이야기이다.

 

오류X가 아닌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나 아이돌 덕질로 외로움을 달래던 요즘 아이 현아가 우연히(?) 꽃다발 선물처럼 받게 된 락싸멘툼(장풍)을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사용하며 살아가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다른 사람(존재)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설계자 손미카가 현아를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정의를 위해 살던 연인 루이즈의 불의한 죽음 때문에 지구를 멸망시키려던 설계자이자 군인인 수거함의 삶도 등장한다.

 

현아에게 입력된 최배달의 데이터를 통해 끊임없는 물음이 삶을 가른다고 이야기하는 부분, 수거함과 최배달이 정의에 대해 마이클 샌델과 무도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부분과 한 사람의 불의한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등을 통해 이야기책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문학 또는 철학서이기도 한 것처럼 만든다.

 

여짓여짓, 갈마드는, 매조지 등의 순우리말이 아주 적절한 상황과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이야기의 감칠맛을 더 해준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들도 보이고, ‘기억이라는 것을 통해 미카가 다시 시뮬레이션 지구에 올 수 있었던 것을 보며 세월호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설계자가 이 지구에 내려오는 모습은 터미네이터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은 설계자들의 모습이 오류가 많고, 불완전하게 보여 불편할 수도 있다). , 작가가 과학적인 지식을 제대로 알고 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과학 이론이나 지식,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나 어그러졌을 때의 외로움, 아픔과 고통도 느낄 수 있다. 이 외로움, 아픔과 고통을 등장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나 모양이 다른 것도 볼 수 있다. 때로는 현아나 미카처럼 죽움도 마다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부분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의 몫이다. 현아 말처럼 사람은 훈계질을 싫어하는 무작위성을 가진 지성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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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 - 더 자유롭고 행복한 페미니즘을 위하여
이리아 마라뇬 지음, 김유경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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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우리나라로 바꾸면 남아선호사상)는 우리나라 문화의 특성인 줄 알았다. 유교문화가 강한 동양, 그 중에서 우리나라만 아직 양성평등이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오해를 깨는 책이다.

 

서양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스페인에 사는 스페인인 저자는 이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가 여성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소위 가해자라고 지목된 남성들도 결국은 피해자이기에 페미니즘을 통해 페미니스트가 되어 몸과 생각, 삶에서 함께 자유로워지자고 한다.

 

다양한 사례와 예시로 쉽게 설득되게 만드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한 예로 남성들은 대화를 통한 갈등이나 문제 해결보다 폭력이 앞선다는 예시나 남성다움, 여성다움으로 제한하는 다른 여러 실제 사례로 드는 예시를 통해 생활에서 저의 언행이나 행동 양식이나 방식을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다.

 

사회의 제도나 문화, 사상, 가치관 등에 의해 수동적인 삶을 살거나 끌려가지 말고, 스스로 몸이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삶을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도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페미니즘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동의와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고 학교 현장이나 가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Advice’ 코너등을 통해 제공한다. 그러나, 다양한 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 등 일부는 너무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적지 않고, 유전자에 새겨져서 타고나는 것도 있는데 모든 것을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틀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하거나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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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랄라 2020-08-04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전자에 새겨진 걸 얘기하려면 페미니즘이 아니라 생물학을 전공했겠죠? 독서는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한 분야를 정해서 그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으며 해당 주제의 패러다임과 방법론, 기본이 되는 가정들과 논의의 진행 과정 등을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다양한 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극단적이라면.... 우리 문화 속에도 남성 여성 중성 무성 양성 등등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다는 것부터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시대나 로마 시대의 다양한 성들에 대해서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읽아봐야 교양이 전혀 늘지 않습니다.
 
한 아이 - 유아교육신서 10
토리 L.헤이든 / 샘터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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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지혜로운 사람이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꾀나 재치, 융통성, 경험이 많은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이나 경험을 현실에 삶에 알맞게 적용하거나 응용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후반까지 나름대로 생각하며 정의하던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였다.

그러나, 이 지혜나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와 토리L.헤이든이라는 특수교사의 체험사례집 한 아이’(샘터 간)를 최근에 새롭게 곱씹게 되면서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특히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지혜들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면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며 목말라 할 때 한 줄기 빛처럼 한 아이가 떠오르며 정말 이것이 듣는 것이며,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다양한 말하기

쉴라는 마음이 아프기에 그 고통을 견디거나 상처가 낫고 싶어서 다양하게 표현하는 아이였다. 언어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증오에 가득찬 눈이나 절대로 울지 않는 것, 헝클어진 머리, 악취를 풍기는 것 등으로 말하였고, 여섯 살 때는 세 살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다음 근처 숲속 나무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외쳤다. 이런 아이였기에 어떤 아이도 선생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쉴라를 가르치게 된 토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난 기사로 쉴라를 처음 알게 되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특수학급(쉴라 말로 미친반)에 아이가 하찮은 돌멩이처럼 맡고자 하는 선생님이 없어서 떠밀려 오게 되었을 때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겨우 한 말이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게 할 수 없어요. 하게 할 수 없어요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외에는 언어로 된 말을 하지 않았다.

 

듣는다는 것

이렇게 힘들게 아이와 씨름하던 토리 선생님은 피보디 그림 및 어휘검사(PPVT)'를 할 때에 쉴라가 잘 맞추는 것을 보면서, 오래된 오줌 냄새를 풍기는 쉴라를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앉히고 껴안아 주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거나, 머리핀을 사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쉴라를 개수대에 데려가 씻겨주는 일 등을 하면서 아이의 몸으로 하는 호소를 들었다. 쉴라의 말을 듣는 것이 고통스러웠기에 토리 선생님 또한 말 없이 몸을 움직이거나 쉴라와의 신체접촉을 통하여 들을 때도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점점 개선되어 가던 토리 선생님과 쉴라와의 관계는 토리 선생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위기를 맞기도 한다. 시험지 풀기를 강제로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건성으로 이루어지는 들음이 있을 때, 잠시 토리 선생님이 회의 겸 휴가를 다녀와서 쉴라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쉴라가 이웃에 사는 아저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도 잠시 솔직하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 토리 선생님의 깊이 있는 듣기가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쉴라의 말하기 뿐만 아니라 듣기가 정확하기 않았던 까닭도 어머니에게 길가에 버려지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의 잘못된 말하기에 쉴라가 바르지 않게 알아 들었던 것이다.

 

인내 그리고 길들여짐

쉴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었고 버려지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난폭한 행동이나 울지 않는 것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사랑하고 어린 왕자를 읽고 토리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서로 길들여진 존재 즉, 토리 선생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한다. 토리 선생님의 진실한 듣기를 통해 쉴라의 마음이 더욱더 치유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쉴라의 경우도 한 학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듣기와 말하기 능력은?

내가 본 수능시험에서 에서 국어듣기와 영어듣기 점수를 생각해보면 꽤 높은 점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하는 양보다는 듣는 양이 훨씬 많다. 그래서,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보았을 때의 토토의 다양한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공립학교 담임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난 교사가 되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오히려 4시간이나 말없이 토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대안 학교의 교장 선생님처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하였다(결국은 교장 선생님이 지혜로운 교사요, 교장 선생님의 듣기를 통해서 토토의 잠재능력이 계발되고 토토가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차이가 큰 평가 혹은 비교대상이 나타난 것이다.‘한 아이의 토리 선생님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듣기에 실패도 하지만 토토의 교장 선생님보다 듣기에 고수(더 지혜로운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토토보다 더 많이 몸으로 말하는 쉴라를 몸으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 공립학교 교사인 나의 모습을 보면 듣기 점수가 형편이 없다는 것을 점점 보게 된다. 수업시간이라는 핑계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다른 일처리 한다는 이유로 30여 가지의 다양한 상황과 아픔,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몸으로 말로 하는 이야기에 시선-마음-을 향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에게 길들여진 존재(특별한 존재)가 아니기에 교사인 나의 말도 아이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가 많다. 또 아이들이 말이 채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의 말을 판단하거나 한편의 아이의 말만 듣고 이렇게 저렇게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도 많아서 사실이 밝혀진 후에 미안하다고 사과한 경우도 있다.

 

나는 지혜로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렇게 진단결과가 지혜로운 사람은커녕 어리석은 교사라고 나온다. 어리석은 교사는 잘못된 듣기를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쉴라의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 처음에 쉴라를 맡았던 다른 선생님들처럼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오히려 학대를 하는 것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다. 먼저 눈을 내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향하고 눈높이을 맞추며 몸을 아이에게 기울여 주는 것이 크기는 작지만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 번에 안 될 것이다. 영어듣기도 몇 개월을 들어야 귀가 뚫려 영어가 들리는 것처럼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반복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다보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점점 커질 것 같다.

단지 아이들을 쉴라처럼 상처를 치료하고 성장 혹은 성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더욱 자랄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 2권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토리 선생님과 쉴라가 헤어진 7년 후 청소년이 된 쉴라를 다시 만난 후에 이야기라고 한다. 토리 선생님이나 쉴라의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커져 있을까?

 

*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중고책으로는 살 수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008년 경 쓴 것이다. 그때 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 글을 다시 보니 여전히 지혜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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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아이들 - 초등 교사 천경호의 학교 이야기
천경호 지음 / 이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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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공부하는 곳일까?

 

저자는 학교를 이렇게 보기보다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의 관계 맺기와 신뢰 가운데 교사와 학생 모두 사랑하며 성장하는 곳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1부에서 3부까지 이런 생각과 마음으로 아이들, 학부모,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만나고 이야기했는지 실제 사례를 풀어 놓았다. 4부에서는 이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 학교(특히 관리자), 교육청, 교육부, 사회가 어떻게 학교나 교사를 지원해 주어야 하는지 글쓴이의 몇 가지 아이디어나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기보다 이전에 자신과 오늘의 자신을 비교해보고 그전보다 자랐는지 보도록 아이들과 대화하고 아이들을 상담하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많이 기다려주고 인내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학부모의 항의 전화를 1시간 가까이 받으며 상담하는 모습은 나라면 못할 것 같은데, 해내는 선생님을 보며 부럽기도 했다. IB, 하부르타 등 외국 교육 프로그램의 유행(?)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근거를 읽으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교육 전문가로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도 와 닿았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전수되는 연수야말로 살아있는 지식이 될 것이다. 글쓴이가 활용한 글똥누기나 작가노트 등의 활동은 내게 맡겨진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하는데 적절하게 적용해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자가 반복적으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성숙하도록 성숙한 교사가 안내하거나 이끌어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맞지만 성숙하지 못한 교사도 있지 않은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학교를 19세기나 20세기의 시각이 아닌 21세기에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 21세기의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와 만나고 대화할 수 있어서 나의 시각도 보다 성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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