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 - 유아교육신서 10
토리 L.헤이든 / 샘터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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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혜란? 지혜로운 사람이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꾀나 재치, 융통성, 경험이 많은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이나 경험을 현실에 삶에 알맞게 적용하거나 응용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후반까지 나름대로 생각하며 정의하던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였다.

그러나, 이 지혜나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와 토리L.헤이든이라는 특수교사의 체험사례집 한 아이’(샘터 간)를 최근에 새롭게 곱씹게 되면서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특히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지혜들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면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며 목말라 할 때 한 줄기 빛처럼 한 아이가 떠오르며 정말 이것이 듣는 것이며,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다양한 말하기

쉴라는 마음이 아프기에 그 고통을 견디거나 상처가 낫고 싶어서 다양하게 표현하는 아이였다. 언어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증오에 가득찬 눈이나 절대로 울지 않는 것, 헝클어진 머리, 악취를 풍기는 것 등으로 말하였고, 여섯 살 때는 세 살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다음 근처 숲속 나무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외쳤다. 이런 아이였기에 어떤 아이도 선생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쉴라를 가르치게 된 토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난 기사로 쉴라를 처음 알게 되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특수학급(쉴라 말로 미친반)에 아이가 하찮은 돌멩이처럼 맡고자 하는 선생님이 없어서 떠밀려 오게 되었을 때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겨우 한 말이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게 할 수 없어요. 하게 할 수 없어요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외에는 언어로 된 말을 하지 않았다.

 

듣는다는 것

이렇게 힘들게 아이와 씨름하던 토리 선생님은 피보디 그림 및 어휘검사(PPVT)'를 할 때에 쉴라가 잘 맞추는 것을 보면서, 오래된 오줌 냄새를 풍기는 쉴라를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앉히고 껴안아 주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거나, 머리핀을 사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쉴라를 개수대에 데려가 씻겨주는 일 등을 하면서 아이의 몸으로 하는 호소를 들었다. 쉴라의 말을 듣는 것이 고통스러웠기에 토리 선생님 또한 말 없이 몸을 움직이거나 쉴라와의 신체접촉을 통하여 들을 때도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점점 개선되어 가던 토리 선생님과 쉴라와의 관계는 토리 선생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위기를 맞기도 한다. 시험지 풀기를 강제로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건성으로 이루어지는 들음이 있을 때, 잠시 토리 선생님이 회의 겸 휴가를 다녀와서 쉴라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쉴라가 이웃에 사는 아저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도 잠시 솔직하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 토리 선생님의 깊이 있는 듣기가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쉴라의 말하기 뿐만 아니라 듣기가 정확하기 않았던 까닭도 어머니에게 길가에 버려지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의 잘못된 말하기에 쉴라가 바르지 않게 알아 들었던 것이다.

 

인내 그리고 길들여짐

쉴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었고 버려지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난폭한 행동이나 울지 않는 것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사랑하고 어린 왕자를 읽고 토리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서로 길들여진 존재 즉, 토리 선생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한다. 토리 선생님의 진실한 듣기를 통해 쉴라의 마음이 더욱더 치유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쉴라의 경우도 한 학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듣기와 말하기 능력은?

내가 본 수능시험에서 에서 국어듣기와 영어듣기 점수를 생각해보면 꽤 높은 점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하는 양보다는 듣는 양이 훨씬 많다. 그래서,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보았을 때의 토토의 다양한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공립학교 담임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난 교사가 되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오히려 4시간이나 말없이 토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대안 학교의 교장 선생님처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하였다(결국은 교장 선생님이 지혜로운 교사요, 교장 선생님의 듣기를 통해서 토토의 잠재능력이 계발되고 토토가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차이가 큰 평가 혹은 비교대상이 나타난 것이다.‘한 아이의 토리 선생님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듣기에 실패도 하지만 토토의 교장 선생님보다 듣기에 고수(더 지혜로운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토토보다 더 많이 몸으로 말하는 쉴라를 몸으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 공립학교 교사인 나의 모습을 보면 듣기 점수가 형편이 없다는 것을 점점 보게 된다. 수업시간이라는 핑계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다른 일처리 한다는 이유로 30여 가지의 다양한 상황과 아픔,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몸으로 말로 하는 이야기에 시선-마음-을 향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에게 길들여진 존재(특별한 존재)가 아니기에 교사인 나의 말도 아이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가 많다. 또 아이들이 말이 채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의 말을 판단하거나 한편의 아이의 말만 듣고 이렇게 저렇게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도 많아서 사실이 밝혀진 후에 미안하다고 사과한 경우도 있다.

 

나는 지혜로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렇게 진단결과가 지혜로운 사람은커녕 어리석은 교사라고 나온다. 어리석은 교사는 잘못된 듣기를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쉴라의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 처음에 쉴라를 맡았던 다른 선생님들처럼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오히려 학대를 하는 것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다. 먼저 눈을 내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향하고 눈높이을 맞추며 몸을 아이에게 기울여 주는 것이 크기는 작지만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 번에 안 될 것이다. 영어듣기도 몇 개월을 들어야 귀가 뚫려 영어가 들리는 것처럼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반복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다보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점점 커질 것 같다.

단지 아이들을 쉴라처럼 상처를 치료하고 성장 혹은 성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더욱 자랄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 2권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토리 선생님과 쉴라가 헤어진 7년 후 청소년이 된 쉴라를 다시 만난 후에 이야기라고 한다. 토리 선생님이나 쉴라의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커져 있을까?

 

*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중고책으로는 살 수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008년 경 쓴 것이다. 그때 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 글을 다시 보니 여전히 지혜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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