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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거대한 군함같은 넓은 집, 그 집에 존스씨가 작은 새라 생각하는 매력적인 여인 미야코가 살고 있다.
그녀는 이미 한 남자의 아내다. 언제나 부지런히 집안을 쓸고 닦고, 남편이 오기 전에 늘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놓고 완벽한 주부의 모습으로 퇴근하는 남편을 맞이한다. 방충망까지 꼼꼼히 닦고, 하루종일 집안일을 해도 모자랄판에 가끔씩 놀러와 수다를 떨곤 하는 그녀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이야기만 나누는 것은 무척이나 게을러 보이는 일일까 싶어서 그 시간에도 부지런히 바구니 안의 무언가를 꺼내 만들고 있다. 짜투리의 시간마저 소홀히 보내지 않는 성격인 것이다.
우선 사실 미야코라는 캐릭터에 대해 기가 죽기 시작했다.
엄청 게을러서 집안일 하는 속도도 더딜 뿐더러, 청소를 유독 싫어하는 나로써는 치워도 치운것같지 않은 상황에 늘 스트레스를 받곤 했는데, 하루종일 부지런을 떨며 집안일에만 매진하는 것도 모자라 수다 타임조차 아깝다 생각한다니.. 일상이 나와 달라도 한참 다른, 말 그대로 모범 주부 같은 그녀가 아니었는가.
갑자기 우리 신랑에게 미안해지네.
아뭏든 그녀의 이런 나름 헌신적인 내조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늘 그녀의 이야기를 툭 잘라 먹는다. 제대로 듣지를 않고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것이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꽤나 공을 들였던 남편이건만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되고 나자, 아내에게 공을 쏟는건 이제 좀 지나친(대부분의 신랑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런 단계이다. 하지만, 하루종일 남편만 기다리고, 자신의 모든 일과를 세세히 보고하는 그런 아내의 이야기를 대부분 흘려 듣는다는 것은 이야기하는 쪽을 상당히 지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나도 신혼 때 혼자 집에만 있는게 너무너무 심심해서 하루종일 있었던 이야기며, 하다못해 인터넷이나 티브이에서 본 이야기까지도 모두 기억해뒀다가 신랑이 퇴근하면 옆에서 종알종알, 그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나중엔 신랑이 "잠 좀 자자~" 고 말할 정도까지 되었었다. 입에 거미줄 쳐지는 양, 어찌나 심심했는지.. 미야코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서 그냥 이야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고의 단계이다. 스스로 생전 보고 못해 죽은 귀신이 씌였나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얼마나 시시콜콜히 보고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처음에 그녀는 몰랐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미국인 존스씨와의 일상 이야기조차 스스럼없이 다 보고를 한다. 심지어 그와 대중 목욕탕 (물론 남녀 각각 들어가는 탕)에 간 신기한 경험, 그러나 외간남자와의 대중 목욕탕이라니 보통 남편이 들으면 경악했을, 까지도 들려주지만, 남편은 그 역이 제대로 생각을 못하고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자기가 듣고 싶은 부분만 듣고 기억하기에 참으로 유리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이기적이기도 하였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청결한 미야코씨와 존스씨의 필드워크를 통한 세상 바라보기가 흥미로웠다.
그저 집 주변, 가까운 동네를 산책한 것 뿐인데 미야코씨는 마치 여행이라도 떠난 듯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누구와의 동행인가, 어떤 이야기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가벼운 동네 산책조차 여행처럼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기분 알 것 같았다. 존스씨처럼 사물을 흥미로이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은 없었지만 아이와 자주 산책을 나가다보면, 사실 별거 아닌 그런 장소인데도 특별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곳들이 있었다. 멀리 여행을 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일상을 여행이라 생각하고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특히나 유모차를 밀거나 아이를 업고 혹은 아이 손을 붙잡고 근처를 산책하는 엄마들이라면 그런 느낌을 아이와 주고 받으면 더욱 행복할 것 같았다.
새장 안의 작은 새였던 미야코씨.
결혼 전에 남자 경험도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오로지 남편만 바라보며 그 이외의 세상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그녀가 존스씨로 인해 세상 밖에 나와버리고 말았다.
불륜은 분명 불륜이다.
그런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 위험한 불륜을 남편의 무관심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공감가게 만들어놨다.
결혼이란 분명 한 남자만 바라보고 평생 이 사람과의 행복을 꿈꾸며 사는 설렘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사랑의 첫 시작만큼 달콤한 것이 없기에 이미 그 단계를 지나버린 결혼의 길고 긴 몇십년의 생활에 사랑의 설레임을 계속 더해가며 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에 서로 정을 더하고, 신뢰를 더해주는 그런 단계가 더해져야 결혼이 굳이 사랑의 연속이 아니더라도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데..
불안불안했던 미야코씨를 끌어내버린 빈 틈이 신랑에게 존재했기에 그 빈 틈을 존스씨가 잡아버린 느낌이었다.
에쿠니 가오리는 위태로운 이야기를 써도 에쿠니 가오리구나.
어쩌면 그녀의 문체는 늘 이다지도 나를 사로잡을까.
그런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