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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소금이지만, 아버지, 또 다른 이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한 염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단지 그것이 이 세상 아버지들을 대표한 희생적인 아버지의 죽음, 그것만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장면은 작품 속에 강하게 새겨져 몇번이나 다시 회상되는 장면이었다.
똑 부러지는 엄마, 그런 엄마에 비해 존재감이 거의 없던 아빠. 많은 집에서 그렇게 살아오다시피, 아빠는 거의 돈을 벌어오는 기계처럼 전락해버리고 엄마와의 유대관계가 깊어진 집들이 많겠지만 유독 그 집은 더욱 심했던 것 같다. 세 딸은 아빠를 도대체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너무 놀랐던 것이 엄마가 막내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배동 일식집 주방장에게 전화를 걸어 생선을 집으로 직접 배달시켜 파티를 연다는 점이었다. 그냥 그렇게 평범한 가정이 아니었다. 일식집의 식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할 정도로 꽤나 잘 사는 그런 집의 이야기였다. 막내딸의 생일날, 묵묵히 일만 하던 가장인 아버지가 가출을 하였다. 아니, 그대로 소식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췌장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졌다.
췌장암에 걸려 실종이 된 아버지, 이후 정말 사상누각처럼 무너져버린 집, 그토록 강인해 보였던 엄마도 무너져내리고, 세 딸에게 남은건 빚더미 뿐이었다.
아버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두 딸과 달리 유일하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막내딸 시우만이 끊임없이 아버지를 찾아나서고 있었다. 십여년.. 췌장암 환자인 아버지가 6개월도 못 사실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아버지가 살아계실거라 믿고만 싶었다.
아빠를 닮은 사람을 본 것 같다는 강경에 그녀가 내려왔다가 폐교의 배롱나무를 보고 그녀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열살 차이나는 그 시인.
시인의 아버지는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이사를 가고, 모든 걸 감내해야함을 너무나 버거워하면서도 일용직 부두 노동자로 전락한 삶을 끝까지 이어나간 그런 아버지였다. 치사해 치사해. 온갖 굴욕을 견뎌내며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항거였고, 그런 그에게 대든 아내를 때리고 아내도 치사해치사해, 자식마저도 치사해가 전염되어 버리고 말았다.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어린 딸들과도 따뜻이 지내던 시절의 짧은 추억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잉여재산이 불어나면서 그는 차츰 그 모든 사랑의 관계를 잃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식들을 소비의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었고, 아내와의 사랑 역시 서로 '빨대'를 꽂아 빠는 기능적 관계로 변모됐다.248p
그들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 이 책에는 엄마보다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강하고 쓸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딸이라 같은 성별인 엄마와 더 친하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우리집만 해도 아들인 오빠도 엄마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평생을 가정을 위해 일하신 아버지, 묵묵히 일하고 성실히 살아오신 아버지지만 자식들과의 대화의 창은 엄마만큼 편하게 열려있지않고 어딘가 모를 서먹함을 꾸리고 있었다. 아버지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그리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말, 내가 돈 버는 기계냐.
우리나라의 이런 모습, 편모, 편부 가정이 아닌데도, 아버지는 한국에서 돈을 벌고 아이들과 엄마는 해외에 나가 기러기 생활을 하며 아빠가 등골빠지게 번 돈으로 공부하고, 아예 외국에 눌러앉아 살거나 아버지와의 연을 끊는 가정의 해체조차 일어난다. 물론 책에선 기러기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등짐은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자녀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님, 또 우리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우리 신랑까지.. 내 주위의 모든 아버지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이었다.
이야기에 몰입되는 속도감도 엄청났고,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되어있는 듯하나 너무나 명약관화하게 연결되는 이야기들에 눈이 저절로 번쩍 뜨이는 그런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거로구나. 뒤늦게 아버지의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100% 공감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공감을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