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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으로는 얼마 전 읽은 제로의 초점이 유일했다. 그때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말도 처음 접했다. 그건 또 무얼까 싶었는데 세이초의 작품을 읽어보니 무언지 감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전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지만 트릭 중심의 허무맹랑한 내용이 불만이었다. 이 작품을 쓰 때는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추리소설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의 눈에 비친 한 여자의 처지를 그리고 싶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잠복 집필동기를 회상하며
세이초의 작품에는 억지스런 트릭을 구상하거나 반전 등의 속임수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미스터리가 이런건가 싶을 정도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어 독자를 기만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실 일반 미스터리가 꼭 독자를 기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스터리라고 해서, 꼭 황당한 설정으로 억지춘향 놀음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 등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추리소설은 충분히 재미나다. 기교가 없어도 재미난 것, 깔끔한 그 느낌이 참 매력적이었다.

41세에 늦깎이 데뷔 후 82세에 이르기까지 총 1000여편의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는 세이초는 일본 미스터리 작가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다 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그가 40에 이르기까지 전혀 작가로써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집필한 소설들을 보면,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제로의 초점 한권만 읽어보았으나 세이초를 지지하는 수많은 국내 팬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나 또한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었었다. 그리고 최초로 참여했던 알라딘 북펀드 또한 잠복이 떴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덕분에 책이 출간되면서 이 75인의 이름 중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잠복은 <얼굴> <잠복> <귀축> <투영> <목소리>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 <일년 반만 기다려> <가르네아데스의 널> 등의 8편의 소설이 수록된 책이었다. 꽤 두꺼워보이는 책이었음에도 정말 술술 읽혀지는 가독성이 좋은 책이랄까.
신간 소개글을 접하고, <얼굴> <목소리> <잠복> 등에도 흥미가 생겼지만, 첩의 세 아이를 괴롭히는 <귀축>의 이야기는 나 또한 한 아이의 엄마로써 참으로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작품들의 출간년도가 꽤 오래되었을텐데도 여전히 신선하게 읽히는 구조가 놀라웠다.
다만, 유난히 술집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얼굴에서 살해당한 여성도 술집 출신 여성이었고, 귀축에 나오는 첩 또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투영에서는 기자가 바의 여성에게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낙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제목의 여성이 바로 바에서 일하는 여성이고, 일년 반만 기다려에서는 남편이 바람피우는 상대로 카페 여사장이 나왔다. 카르네아데스의 널에서도 주인공 교수와 내연관계에 있는 술집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만큼 당시 남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풍토가 만연했다고 이해를 해야할지, 요즘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걱정해야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유약한 성격에도 바람을 피워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던 남자가 아내의 등쌀에 떠밀려 아이들을 학대하고, 자신의 자식이 아닐거라 애써 위안하는 과정은 정말 정나미떨어지게 만드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바람이라는 것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이가 무슨 잘못일까 싶었는데, 아버지라 믿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그 기분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아이엄마로써 용서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세이초의 특징이 평소같으면 싫어할 그 상황조차, 작품 속에서는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잠복에서도 그랬다. 가정주부의 불륜 등이 평소같으면 절대 용납 못할 일이라 생각했을텐데, 이 책에서는 그럴수밖에 없었을,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주부 사다코에게는 몇시간이나마 꽃을 피울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드러내주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 그녀는 평화로우나, 지극히 그녀를 시들게 만드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목소리는 말 그대로 으스스한 내용이었다.
신문사 교환원으로 일하는 도모코는 어느날 잘못 건 전화 통화에서 그녀가 살인범일지 모르는 남자와 통화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 나온 살인사건의 주소와 피해 시각이 그녀가 잘못 전화건 시각과 거의 일치했던 것, 게다가 그 기분나쁜 남자는 "여기는 화장터야"이런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유난히 목소리 감별에 뛰어난 그녀였지만, 목소리만으로 남자를 추적해 잡는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이초가 천여편의 작품을 남겨주었음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그만큼 읽을 책들이 즐거움으로 쌓인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장편, 단편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난 흡입력을 자랑하는 세이초의 작품, 앞으로도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