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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ㅣ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점에 직접 나가 보니 논어에 관한 꽤 많은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었다. 그중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도 있었다. 논어를 있는 그대로 번역한 책도 있겠지만 많은 부분 주석본 번역이 많아서, 논어 완역본을 그대로 읽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주석이라함은 주석을 단 사람의 느낌과 감상이 많이 들어갈 수 있기에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논어는 커녕 귀에 익은 수많은 고전들을 거의 읽어보지 않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옛 사람들이나 혹은 한문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논어를 공부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고루한 내 편견이었는지 모른다.
고3때 같은 본고사 학원에 다녔던 남학생 하나가 중학교때 이미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라는 이야길 듣고, 교과서에서만 들어본 그 제목들을 실제로 책으로 읽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저런 괴짜같은 인물이 다 있을까 하는 눈으로 그 친구를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물론 아주 똑똑한 친구였고, 많은 인문 고전을 읽은 영향인지 몰라도 학원에서도 월등한 기량을 뽐내던 친구였다. 언젠가 내가 논어를 읽을 날이 올까 싶었지만, 나이를 먹어도 고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지는 않았었다.
그러던 내가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건 고전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어느 책 한권 때문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게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동화, 소설 등의 문학류 이외에도 고전이나 사회과학, 인문 등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섭렵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할텐데, 책 하면 아직도 내게는 읽는 순간의 재미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성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내 아이에 한해서는 문제가 달라질 법 했다. 고전을 읽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가 월등할 수 있다는 것, 고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된 책을 읽고 나자 엄마인 나부터 조금씩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읽기 싫은 책을 아이에게 읽으라 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먼저 읽자. 그래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게 고전 번역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신 김원중님의 논어와 김영수님의 사기 본기였다.
우리나라에서 고전번역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두분의 책을 거의 동시에 만나게 되었는데, 먼저 읽어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잘 읽힌다는 평이 많았음에도 소설 등에 비해 자꾸 어렵다는 편견으로 책을 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다 드디어 책장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제자들이 모아 엮은 책이다. 유학이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까지 깊이 영향을 미친 점, 특히 거의 25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유교의 영향이 사라졌다고 볼수없음을 생각해보면 공자라는 한 사람의 파급력이 정말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그분의 이야기인 논어를 읽지도 못하고, 그저 공자라는 사람에 대한 이러저러한 풍설 등을 다른 책들에서 잡다하게 만날 수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근본을 잊고 주변 이야기만 들으니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공자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좀더 발전하지 않았겠냐는 책까지 나오고 있는 요즘이 아닌가. 그럼에도 다시금 많은 사람들, 일반인뿐 아니라 정재계 인사들에게까지 두루 읽히고 있다는 최고의 고전 논어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논어라는 책이 공자라는 프리즘으로 그가 처한 춘추시대라는 당대를, 그리고 그 인간의 본질을 뚫어보고자 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냉엄한 잣대로 당대의 인물들을 재단하고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도 서릿발같은 말로 단죄했다. 때로는 감성적이고 순진한말로 허심탄회하게 인간 그 자체를 감싸기도 했다. 공자가 고민했던 바로 그 문제들이 오늘 이시점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본다면 <논어>가 얼마나 인간의 진면목을 꿰뚫었던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32p 해제
두렵게 생각했던 논어가 대화체로 되어 있어 본문을 읽기 시작하니 번역본을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왜 그토록 거리감을 느꼈던 걸까. 한문으로 직접 읽는게 아니라 번역본을 읽는 거였다면, 중학교 이전에 이미 읽었다라는 친구처럼 그 맘때쯤 읽어도 무리가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배움의 앞과 뒤 8.1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울때는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듯이 한다." 159p
워낙 오래된 고전이기도 하고, 수천년이란 긴세월이 지나면서 현대사회와 고대의 많은 모습이 달라져 있음에 유교의 도리를 강조하는 것만이 옳다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논어 속에서 취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무궁무진함을 배우는 구절들이 많았다.
사람과 말 10.14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물러나와 말씀하셨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러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위의 하단 각주를 보면, 본문을 어떻게 끊어 읽는가에 따라 의미가 전혀달라진다라고 한다. 필자처럼 읽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나 "사람은 다쳤는가. 아니구나.(그리고)말에 대해 물어보셨다."라고 번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게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알면서도 사소한 상황이거나 할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물질, 재산에 대비되는 그것에 눈길을 돌릴때가 많다. 또 상대방의 그런 반응에 서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성인군자의 마음가짐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물론 공자 역시 제자들에게도 화를 낼때가 있고 노여워하기도 하나 그의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각주에 달린대로 새로이 해석되기보다, 전통적인 방식대로 해석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줄 것이다. 아이가 사소한 장난이나 부주의한 실수로 무언가를 망가트리거나 엉망인 상태를 만들어놓았을때, 아이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기는 해도, 아이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는 엉망이 된 상태 혹은 망가진 물건 등에 대한 화가 샘솟아 아이에게 좀더 조심하지 못했음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공자의 큰 그릇에 비견될 수 없는 나의 평범한 그릇의 크기 차이겠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논어를 따로 읽은 적은 없었으나 여러 문헌 등을 통해 혹은 학교에서도 인용구절 등을 통해 익히 들은 표현들이 무척 많아 놀랍기도 했다. 논어에 나온줄 모르고 귀에 익은 말들도 또한 많았다. 한자에 능한 편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한자만 공부했으므로) 한자 원문까지 직접 음미하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번역자체가 수월하게 이루어져 있었고 매 페이지마다 하단 각주가 친절히 설명되어 있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요즘 나오는 수많은 명언집들, 자기 계발서들을 읽지 않더라도 고전 중의 고전인 논어에 나오는 말 중 명구절을 기억해 자신의 거울로 삼으면 자기발전의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