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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 ㅣ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로 유명한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책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책은 피터 윔지 시리즈 중 5번째 작품으로, 그녀가 추리 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해에 발표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추리소설기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대에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명성을 얻게 한 피터 윔지 시리즈라고 하니 이 책으로 처음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풋내기 추리소설 팬이지만, 기대치는 남들 못지 않게 높아졌다.
맹독이라는 치명적인 제목과 달리 줄거리 내내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흐르기도 한다. 일방적인 사랑이야기긴 하지만, 첫눈에 피고인에게 반해,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로 빼도박도 못하게 생긴 불쌍한 피고 해리엇 베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피터 윔지의 짝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둘의 만남은 이후 피터 윔지 시리즈에서 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니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해리엇 베인, 그녀는 추리소설을 쓰는 소설가이자, 때마침 쓰고 있던 소설이 비소로 연인을 살해하는 이야기였는데, 하필 그녀와 사귀었던 전 애인이 비소 중독으로 인해 사망하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녀와 있던 시간이나 그녀가 비소를 사간 정황등이 들어맞아 마치 그녀가 확실한 살인범인것처럼 굳어졌고, 판사는 피고의 입장을 고려하기도 싫은 듯 그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 배심원들을 독촉하기까지 한다. 누가 봐도 불리한 그녀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귀족 탐정 피터 윔지였다.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클림슨양의 도움으로 유죄판결이 거의 확실했던 배심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배심원중에 클림슨양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피터의 마음과 똑같이 행동했다.) 이후로 사건 해결에 필요한 또다른 첩보원 등을 투입하는 데도 클림슨양이 추천해준 머치슨 양의 활약이 컸다. 이후 클림슨 양은 또다시 놀라운 활약을 한다. 여성들이 거의 탐정 못지않게 놀라운 활동을 보이는 것이 인상깊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오히려 해리엇 베인은 신비주의처럼 사건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고, 당사자로써만 조용조용히 등장할 뿐이었다. 피터 윔지 또한 자신의 수족이 될 직원들을 적시 적소에 배치하고 도움을 얻지만 귀족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아랫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데 익숙해 보였다.
"괴이하군." 윔지는 베드퍼드 로를 뚜벅뚜벅 걸어가며 생각했다.
'모두들 사건에 관해서 놀랍도록 협조적이란 말이지. 내가 물어 볼 권리가 없는 질문을 하는데도 열심히 대답해주질 않나 불필요할 정도로 갑자기 설명을 쏟아놓질 않나. 아무도 숨기지 않는단 말이지. 정말 놀랍지. ..'190P
피터 윔지의 독백대로 정말 너무나 사람들이 협조적이라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완벽히 궁지에 몰린 그녀의 누명을 어떻게 벗기고 실제 범인을 찾게 될지 궁금해졌다. 책을 읽으면서 중반부로 갈수록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소재 등이 등장하고, 예상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흘러가기는 했지만, 추리소설가와 귀족탐정의 매혹적인 만남으로 인해 (추리 소설 사상 가장 지적인 연인이라는 그 표현이 참으로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잔인한 살해장면의 묘사가 없이도 흐뭇한 기분으로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해리엇 베인이 예상대로 작가의 페르소나였다. 해리엇 베인이 희생자 필립 보이스와 겪은 어정쩡한 연애 관계도 실제로 작가의 연애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이상적인 연인, 피터 윔지같은 사람을 만나고픈 마음에 소설 속에 해리엇 베인을 등장시키고 소설속에서나마 진정한 사랑을 추구해보고자 했던 바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상상 속 이야기가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는 멋진 공간이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