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뉴욕
이숙명 지음 / 시공사 / 2011년 7월
품절


전직 패션지 에디터의 이야기라서일까? 우선 말투부터가 참으로 재미나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좌충우돌 코믹 시트콤처럼 되어버린 이야기지만, 외국에 나가 고생한번 안하고 살다왔어요는 거짓말이라는 그녀말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참으로 처절한 이야기가 한가득 펼쳐진다. 한국에서부터 뉴욕까지 말이다. 어느 직장이건 힘들긴 매한가지겠지만 마감에 시달리고, 인터뷰에 시달리다 갑자기 7년 다닌 직장에 사표 던질 결심을 한 그녀의 일상은 아, 정말 이렇게 빡빡하게 살면 미치겠다 싶은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난 어땠던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늦게까지 야근하는 일은 드물었어도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 부서상대하기, 또 업무 수행함에 있어서도 나날이 날이 세워지는 느낌에 오래 직장생활하다가 성격 다 버리겠다란 생각만 가득 들었었다. 뭐 매력만점 둥근 성격은 아니었어도 그렇게 모나지는 않았다 싶었는데 어찌나 날이 서 있었는지 결혼도 용케 했다 싶을 정도. 누가 한마디만 하면 다다다다다 그대로 뱉어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같아선 많이 유해져서 컴플레인 할 상황인데도 좋은게 좋은거지 뭐 하고 푸념 정도로 그냥 넘어가고 마는데..예전 직장 생활 할때의 내 모습은 정말 참고 넘어가면 나만 바보된다라는 강박관념에 제대로 독기가 올라있는 상태였다.

헉헉. 그녀의 글을 읽다 괜히 내가 흥분해버렸다.
아뭏든 그녀의 말투, 무척이나 흥미롭다. 글재주는 괜히 나오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 뭐랄까 약간 시니컬한듯 하면서도 세상을 재미나게 읊조릴 수 있는 그런 말투랄까? 내가 좋아하는 이웃님들의 냉철하면서 유머를 즐길줄 아는 그런 말투랑 많이 닮았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 나절 아기 자는 동안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가 "너클 크레인" 하면서 일어나는 통에 (오늘은 재활용 분리수거일, 아기가 좋아하는 너클 크레인 소리가 때마침 들려왔고 좀더 자길 바랬던 울 아기 잠을 날려버렸다.) 잠시 뉴욕으로 날아갔던 내 정신은 우리 동네 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

뉴욕에 간다해서 거창한 무슨 목표나 관광 의지를 갖고 간 것이 아니라, 그냥 편히 쉬러 가는게 목적이었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뉴욕행. 멋지게 시작할 것같았던 그녀의 삶이 하루 아침에 법정에 그녀를 증언대에 세우게 하고, 친절한 nypd들과의 만남까지 즐기게 한 (거의 영화 스토리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원룸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후배와 친구가 사는 방에 얹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후배들이 떠나자 혼자서 주거공간을 찾다가 어느 외국인룸메이트와 동거를 하게 되었는데 또 그동안 사귄 남자친구 (굳이 보이프렌드인지 어떤지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남자인 친구라고 말하는게 옳을듯) 또한 한국에서 보기 힘든 똘끼 가득한 사람이었다. 홈리스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뉴욕을 단단히 사랑하게 된다.

나이 찬 여자의 해외여행이라 하면 십중팔구는 <파리의 연인><프라하의 연인> 속편쯤 될 시나리오나, '누구누구는 유학 갔다가 파란 눈에 금발 머리 연하남을 만나서 결혼하고 눌러 앉았다더라' 등의 이웃집 금송아지 스토리에 가슴 부풀기 마련인데, 이건 뭐 잡지나 케이블 TV에서 실용정보랍시고 대놓고 조언할 주제가 아니니 다들 궁금증만 한 가득인 모양이다. 133P

내 눈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영화배우 루시 리우건만 외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인상인가보다. 그래서인지 동양인 여성들이 외국에 나가면 꽤나 많은 대시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접했고, 그녀 또한 그런 소문의 희생양(?)처럼 되기도 한다. 클럽 같은 데서 그런 일이 특히나 많이 일어났다고 그녀의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녀 또한 나처럼 클럽보다는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뉴욕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는 또 흥이 나게 즐길 분위기가 되었나 보다. 눈에 불화장(?)을 하고 관광차 가볼 생각을 다해봤다니 말이다.

아뭏든 평범한 관광지로서의 뉴욕 (물론 뉴욕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드물겠지만)보다는 몇달간의 휴식같은 삶을 통해 뉴욕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 룸메이트 L양의 뉴욕 보따리 장수 동참기서부터 나홀로 사립탐정 놀이 등등 그녀의 재미난 에피소드들은 예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픈 평범한 여행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책을 읽기전 처음에 쭈르르 훑어보고, 사진이 많지 않아 아쉽다 생각했던 것이 다 읽고 나서는 와 정말 재미있었다로 바뀌어버렸다.

해외 셀렙을 데리고 커버 촬영을 한다는 건 한국 잡지로선 꽤나 큰 프로젝트다. 설상가상 프로덕션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친구의 몸속에 사리가 생성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다 보니, 껌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떼어지지 않던 잡지에 대한 미련이 말끔히 사라져간다. ... 모처럼 현장에 나와 보니 '그래 이거였어. 이래서 일을 관둔 거였어. 그만두길 참 잘했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것이다. 213P

무엇보다도 동질감 팍팍 드는 그녀의 털털한 말투들이 마음에 들었다. 명품을 팔면 자신이 명품인양 거들먹거리는 명품 직원들을 꼬아 말했던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생각 곳곳이 배어있는 공감가는 이야기랄까? 패션지 엘르 에디터였음에도 남들 생각과 달리 소탈하고 평범했던 그녀의 일상은 거리감을 싸그리 날려주는 그래서 가깝게 느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패션지 기자라고 하면 정말 연예인들처럼 쫙 빼입고 근사한 파티를 즐기며 옷차림이 허술하면 사람취급도 안할 것 같은 (요즘에 그런 사람 너무 많다. 하물며 동네 H모 은행에서조차,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해 정말 기분이 팍 상했었다.) 그런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날려주어 공감팍팍. 그래도 진지한 그녀의 이야기에 돌아오는 길에 눈물로 무릎까지 적셨단 스토리에는 가슴이 좀 아파오기도 했다. 뭔가 현재진행형이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오랜 여행 끝에 남는 것은 정말로 시야가 넓어지고 또다른 여행객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이 남았다 하니. 긴 장기 체류 여행은 꿈도 못 꿔본 소시민으로써, 어떤 느낌일지 부럽기만 한 기분도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