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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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늘 아버지와 함께 책을 읽는데, 조정래 작가님의 책은 항상 아빠께 먼저 권해드리는 편이다. 이번 책도 먼저 읽어보셨기에 어떠셨냐고 여쭤보니 "늘 그렇듯 무척이나 글을 잘 쓰시지.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이 그대로 드러날만큼, 그런 글을 잘쓰시는 분이지." 라고 말씀하셨다. 그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이 읽어내려간 책이 바로 비탈진 음지였다.



40여년전의 무작정 상경 1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 농촌의 산업화로 인해 땅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와 살아남기위해 버둥거려야했던 많은 이들의 눈물과 애환이 담겨있는 책, 전라도 말투가 하도 구수하게 살아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또한 놀라기도 했던 책. 글 속에 삶을, 그리고 한스러운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이렇게 잘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은 아마 조정래 작가님만이 가진 능력이 아닐까 싶었다.



며칠만에 몸살에서 풀려난 복천은 코끝에 스멀거리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속을 뒤집는 역한 냄새였다. ...그건 서울만이 지니는 서울의 냄새였던 것이다. 그 후로 복천은 그 서울 냄새를 심심찮게 맡으며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었다. 목이 타들어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도 물 한 그릇 얻어마시지 못한 오늘 오후 같은 때는 서울 냄새는 유난히 역하게 속을 뒤집는 것이었다. 162.163p



1973년에 발표한 중편 비탈진 음지를 거의 새로 쓰다시피해서 장편소설로 펴낸 책이 바로 동명의 제목인 이 책 장편 비탈진 음지다.

주인공인 복천 영감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동네 마을 사람의 소를 몰래 팔아 두 자녀와 함께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상경한 서울 인심은 참으로 야박하기만 하다. 다행히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만나 (말투만으로 반가움에 덥썩 손을 잡고팠을 그였고, 그리고 그렇게 만난 대부분은 그와 중요한 연분으로 자리잡았다.) 생활 터전에서부터 할일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얻게 되지만,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 역시 행복한 일 보다는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 또한 여러 직업에 도전해보지만, 서울의 각박한 인심을 뚫고 살아남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뭐요? 아, 병 하나에 몇 푼 한다고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까지 싸워요. 병 여섯개가 아니라 60개를 팔아보시오. 그 돈으로 이 핏값이 나오나. 그까짓 병 여섯갤 가지고 괜히.... 200p



이제나 저제나 복천영감의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가건만, 소설 속 상황은 실제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볕이 들지 않는 비탈진 음지, 두 아들 딸을 어떻게든 고이 길러보고 싶은 (딸은 벌써 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마음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부자들의 학대와 멸시, 그리고 같은 가난한 사람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괴롭히고 자신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핍박을 견뎌야하는 것 뿐이었다.



가난한것은 죄가 아닌데도 가난한 사람은 그리도 모진 설움과 학대를 벌로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옛날자신이 그러했고, 지금 그 아가씨가 또 당하고 있었다. 247p



서울에서 만난 그나마 정이 되고픈 사람들, 그 인연들이 참으로 슬프게 풀리기만 한다. 어쩜 다들 이렇게 일이 꼬일까..

그의 카알 가아씨오. 소리를 듣고 반가움에 한걸음에 달려왔던 정 많던 식모 아이는 결국 부잣집 사람들의 농간에 의해 여자로써 겪어선 안될 일을 겪으며 인생의 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똥낀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그들을 전라도라 그렇다 몰아세우고 욕을 퍼부어대던 부잣집 안주인의 말이 맴을 돈다. 사람들이 이렇게 패악스러울 수 있구나. 그들이 겪는 수모가 이게 끝이 아니길 바래고 또 바래는데..



일찌감치 집 나간 큰 아들의 알려지지 않은 행보가 끝까지 불안한 궁금증을 남기면서, 복천영감네 볕들지 않는 슬픈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휴가 기간내에 두 권의 책을 꾸려서 여행을 다녀왔는데, 차 안에서고 숙소에서고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몰입했던 책이었다. 작가님이 말해주고픈 대로, 가난이 그들의 죄가 아닐진대 학대와 설움을 끝없이 감당해야하는 과거의 그들은 우리가 아는 그 누구일수도 있고, 정도의 차가 있을지라도 우리 부모님, 혹은 또다른 친척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난의 고리를 못 끊고 있는 우리네 이웃들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기에 이 책은 여전히 다시 읽혀져야 한다고 씌여 있었다. 모든게 아쉽고 힘들었던 시절, 요즘은 정말 물자나 뭐든 넘쳐나기에 아낌없이 헤프게 쓰는 아이들도 많고, 어른들 역시 그러기 일쑤였다.



버려지는 모든 것들, 가난한 우리 선조들,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너무나 아쉬운 물자일수 있었다.

콜라 한 모금의 비싼 가격이 아쉬워 수돗물을 얻으려했다가 그것도 얻어마시지 못하고, 결국 돈 주고 사먹는 수돗물로 목을 축여야하는 복천영감의 신세와 돈 한푼 못 받고, 헌 옷, 끼니 식사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공짜 식모살이를 해야했던 식모 아이의 이야기들은 정말 그러던 때가 있었구나, 다시 읽어도 가슴 아픈 그런 이야기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 가난을 조금 벗어났다 하더라도, 허리끈을 좀 동여메고 아끼고, 아쉽게 살아갈 수 있어야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그런 소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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