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장바구니담기


조정래 작가님의 장편 소설 몇권을 읽다보니, 일제치하서부터 6.25 동란 이후의 혼돈기, 그리고 그 이후의 시기까지..그 아픈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 무척 많았다.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너무나 무시무시해 자꾸만 잊고 싶은 그런 아득한 이야기들. 자꾸만 무책임하게 외면하려는 나를 작가님은 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똑바로 보아라. 하며 그 앞에 데리고 가는 듯 하였다. 물론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그 시대를 살아온 여인들의 한이 온통 응축된 그런 소설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픈 현실 속에서 힘없는 나라의 국민이 외모가 예쁘다는것은, 아니 한떨기 어린 소녀라는 것 자체가 재앙일 수 있었다. 오늘날 수많은 할머니들이 정신대 일로 고통을 받고 있듯이.. 소설 속 점례는 억울하게 고문을 받고, 거의 반죽음이 된 부모를 살리기 위해 17 어린 나이에 일본 순사의 첩, 아니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부모의 목숨을 빌미로, 도망가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든 벌레같은 인간. 그녀는 그의 아들까지 출산하게 되었고 아들이 돌 지났을 무렵 해방이 되어 자기네 나라로 도망을 가버린 순사 탓에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그런 삶을 절대 원치않았던 그녀만의 몫이 되어버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들 하나 키우며 막막한 인생을 살던 그녀를, 보다 못한 어머니와 큰 이모가 합세하여 새로 시집을 보내게 되었고, 사랑 없는 출산이었으나 피붙이에 대한 정으로 차마 아들을 두고 시집갈 수 없었던 점례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기만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조선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의 일생동안 가장 행복한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두 딸을 낳았고, 남편이 인민위원회 간부로 일하다 미군의 반격 후에 북으로 혼자 피신을 가버린 탓에 그녀는 또다시 낙동강 오리알, 아니 그보다도 심한 빨갱이 취급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젖먹이 아이를 업은채 취조를 받다 아이는 이질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녀의 신원 보증을 서준 댓가로 푸른 눈의 미군 장교의 현지처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낳기가 겁이 났던 푸른눈의 아들까지 낳고 보니, 미군 장교는 다시 미국으로 훨훨 떠나가버리고 그녀와 세 아이만 세상에 남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식을 지켜내기에는 전쟁의 물결은 너무나 거세고 무정했다. 항아리가 실히 한 길이 넘는 구덩이에 내려졌다. 점례는 흙을 항아리 위에 뿌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황토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리고 있었다. 얘들 잘 키워 열두 폭 병풍 해서 시집보내 줘야지. 남편이배냇짓을 하는 작은딸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228p



전쟁 후의 홀아비들의 구애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꿋꿋이 자신을 추스려 아이들을 키운다. 외모상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일본 순사의 아들인 첫째는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셋째 혼혈 동생의 존재만을 멸시하고, 조롱한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쏟는 그 손가락질에 대한 울분을 동생에게 한풀이를 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랑으로 낳았던 둘째 딸 세연은 듬직하고 자상했던 아빠 만큼이나 다정다감하고 성실한 딸이었다. 언제나 상처받는 동생을 감싸고, 엄마를 위로하고,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틈틈이 퇴근 후 엄마의 일을 돕기에 바빴다.



여자로써 정말 최악의 상황이란 상황은 모두 겪어가면서 단지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강인하게 버텨와야했던 점례.

그녀의 한 많은 인생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끔찍한 야마다 순사의 아들이었지만, 자식에게는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오로지 사랑으로만 키웠다. 아이에게는 원망도 무엇도 없었다.

게다가 셋째는 외모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비난어린 시선을 받게 만드는 혼혈아였다. 그녀가 원치 않았어도 그들에게 그녀는 양공주였으리라.

유일한 사랑으로 낳은 딸 세연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세 아이 모두 똑같이 사랑으로 키웠고, 자식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치기만을 바랬는데, 그 하나의 소원만도 이뤄지질 않는다.




민족의 비극, 시대의 아픔이라는 너무나 큰 사안을 한 여자의 가녀린 몸뚱아리 하나로 견뎌내기엔 너무나 잔혹한 인생이었다.

편안한 시대에 나고 자란 것조차 죄송스럽게 느껴지는 이 깊은 밤, 한동안 황토 속 점례의 슬픈 사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