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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
그 이름만으로도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 꽤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명 소설 작가.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서 골든 슬럼버를 처음 읽어보았고, 이 책이 두번째로 만나는 책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사카 고타로를 읽었고, 그의 신간인 바이바이 블랙버드에도 열광을 하는 듯 하다.
사실 책을 읽기전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이..이 책이 완전한 창작이 아닌 다소 독특한 구성으로 시도되는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자이 오사무의 열혈팬이라, 본인은 그 작가의 소설을 절대 읽어보지도 않는 고집을 부렸다 한다. 그런데 편집부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미완성 작품인 굿바이의 속편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오랜결심을 꺾고,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것. 굿바이의 내용은 다섯 애인을 둔 남자가 어떤 여성을 만나면서 과거의 애인들에게 차례로 이별을 통고하는 그런 줄거리라고 한다. 이사카 고타로는 그 주된 골자만 그대로 차용하고 그만의 색깔을 입혀 새로운 소설을 내놓았다. 어느 유명 영화나 소설의 속편이라고 하면 대부분 전작을 능가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일이 많았는데, 전작인 굿바이를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이 책이 충분히 재미있음에 먼저 감동을 하였다.
사실 양다리도 싫어하는, 바람이라는 자체를 무척이나 혐오하는 나로써는 다섯다리나 걸친 문어인간같은 주인공이 처음에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자는 그가 천사처럼 느껴진다 평을 하였으나, 아니 아무리 착하다 한들 다섯다리나 걸친 남자는 애초에 글러먹은 남자가 아닐까 생각되었기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마음에 안드는 상황이란 점과 실패하기 좋은 확률인 유명 소설의 속편이라는 핸디캡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단지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이라는 이름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후회가 없었다.
바람둥이의 조건일것같은 매력적인 외모와 대단한 능력, 계산된 언행. 이 모든 것들이 주인공 호시노 가즈히코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다섯 다리나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산적으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진심이었고, 이별의 순간까지도 그는 상대방 여자들을 걱정한다.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각 이야기는 가즈히코가 만난 여자들과의 에피소드와 이별로 이뤄진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회색으로 구분된 페이지는 가즈히코와 여성들의 첫 만남 부분이다. 그녀들이 어떻게 가즈히코에게 끌리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고, 원래의 흰 페이지로 돌아오면, 모든 여성들의 반응이 신기할만큼 닮아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라는 거짓말에 대한 부분으로 말이다. 나와 만나면서 갑자기 헤어지자 하는 것은 나를 처음에 유혹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냐는 것이다. 하지만, 가즈히코는 모두가 진심이었고, 유혹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의 일상 속에 묻어나는 작은 관심, 혹은 배려의 행동들이었다. 독특한 사람. 페이지를 넘겨갈 수록 천사라 느끼기는 힘들지만, 자기 자신 하나 지키기 힘들어보이는 이 남자가 마음만은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애초에 한 사람을 선택했어야지. 하는 식의 작은 동정론도 펼쳐본다. 물론 이 남자가 처한 위기는 다섯 여자를 만나기때문이 아니다.
남자는 어떤 이유로 막대한 빚을 져서 사채업자에 의해 어디론가로 끌려갈 버스에 실릴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여진 감시관리인은 180 cm,에 180kg의 거구의 여성이다. 그녀는 몹시 잔인한 취미까지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대놓고 기뻐하며 즐기 악취미를 갖고 있는 것. 그녀의 사전에는 (실제 검은 마커칠이 된 사전을 들고 다닌다.) 동정, 배려, 이런 단어는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그가 끌려갈 버스는 다섯 명의 인간이 타서, 되돌아올때는 너무나 혹독한 일을 겪은 나머지 다섯명의 "인간 아닌 것들"이 돌아오는 그런 끔찍한 곳이라며 그에게 친절한 설명까지 해준다. 궁금증이 일지만, 너무나 공포의 대상일..그런 버스. 우리나라의 삼청교육대, 실미도 영화 등이 떠오르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다가 아기를 재우려 옆에서 깜빡 같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이 책의 이 줄거리가 잠깐 소개되어 놀라 깨기도 했다.
남자가 버스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자신이 무자비하게 지옥같은 곳으로 끌려가기전, 갑자기 연락이 끊겨 걱정할 애인들을 걱정한다는 것.
남자를 절대적으로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겠다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엄마의 사고사를 알게 된 충격이 남아, 통고없는 이별을 애인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를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줘. 나는 산수나 계산을 엄청 싫어하며 산 인간이니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아, 그랬군'하고 생각했다. 계산을 싫어했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인간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218p
무거울 수 있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지옥의 미지의 버스에 끌려갈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이별에 소금치며 기뻐하는 마유미라는 거구의 여인을 바라봐야한다는 것 등등) 재미를 유지할 수 있던 큰 요소들이 이사카 고타로의 유머로 등장을 한다. 그만의 유머. 참으로 무서운 마유미옆에 있으면서도 참 솔직한 그는 생각도 하지만, 실제로 그녀 앞에서 해선 안될 말들까지 하고 만다.
딸기밭에서 만난 전 불륜녀, 바람핀 남편에게 충격받아 이혼한 아이가 있는 이혼녀, 로프와 만화를 사랑하는 사차원 만화녀, 성실하고, 계산에 능한 계산녀, 그리고 뛰어난 미모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탑 영화배우 그녀까지.. 다섯명은 아주 직업도 다양하고 그와 만난 사연도 다양하다. 놀라운 점은 그녀들의 사랑에 대한 허점(?) 같은 취약점에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의 순수함이라는 코드가 그녀들의 그것과 맞아떨어졌다고 해야하나?
이별 통고에 게다가 그 사연이 마유미와의 결혼이라는 위장 조건(?)이 붙어 있어 그녀들은 그 극한 슬픔을 감당하기도 힘들면서 무섭기도 한 마유미와의 결혼에 어이상실의 이상한 기분까지도 맛 봤을 것이다. 각각의 여인들이 아픈 마음에 일일이 자극을 주어 상처에 소금을 뿌린 마유미의 행각이 참으로 못마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착한 주인공 덕분에 희한하게 둘이 콤비를 이뤄 그녀들의 뭔가를 해결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뛰어들려 하는 이야기들이 놁랍기도 했다.
중간에 끊기가 힘들 정도로 (아기를 재운다던지 하는 피치 못할 사정 외에) 너무나 재미있는 소설이어서, 그리고 책을 다 덮을 무렵에는 이 한심해보였던 바람둥이 남자가 하나하나의 사람들에게 모두 다 진심이었고, 모두를 걱정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어여뻐, 배타적인 감정을 좀 자제할 수 있었다. 아마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인류를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가즈히코는 자신보다 마유미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이사카 고타로, 그의 신작에 반하여 남은 그의 작품들도 마저 챙겨 읽고픈 마음이 진지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