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드 노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절판


한때 일드와 일본 영화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일본하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소재로 뒤덮였을 거라는 편견을 확실히 깨주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영화보다 더 순정적이고 깨끗한 사랑을 묘사한 그런 줄거리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때묻지 않은 듯한 그런 이야기가 참 좋았다. 한참의 열성을 가져야 빠져들수있는 일드의 세계, 귀차니즘이 지나치다보니 이제는 그나마도 찾아보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드라마, 영화 등에 드러난 일본 젊은 여성들의 느낌을 보면 약간 푼수같기도 하고, 무척이나 귀여운 그런 면들이 종종 보인다.

그런 영화 몇 편이 기억에 남아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때 귀여움으로 인기를 끌었던 아유미의 느낌이랄까? 또래의 우리나라 여성들이 상당히 어른스러운데 반해 영상에 그려진 일본 여성들은 우리나라 여고생들을 보는 듯한 깜찍함이 곁들여져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무비


2007년 개봉되었던 영화 클로즈드 노트. 사와지리 에리카, 다케우치 유코라는 투톱 여배우의 연기로 수많은 인기몰이를 하며 사람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을 영화의 동명의 원작 소설, 클로즈드 노트.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의 이야기를 동명의 원작 책이 출간되어 책으로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사실 결혼 전, 아니 아기 낳기전만 해도 영화에 더욱 빠져있었지만, 이제는 단연코 책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아기가 어리다는 핑계도 있지만 영화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계를 책에서는 무한하게 느낄 수가 있어 좋기때문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무비


"다음은 4차원 소녀, 호리이 가에! 할때는 하는 여학생입니다!" 241p

독특한 정신세계로 4차원 소녀로 불리우는 호리이 가에. 교대생이지만, 선생님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어설퍼보이는 그녀의 수많은 빈틈이 그녀의 진로나 연애사를 방해하곤 한다.



'인간 국보'

그리곤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이러면 됐지, 싶어 조심스럽게 앞뒤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점원이나 아버지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에게 그때 일을 말했더니 당연하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냥 '인간'에서 멈췄으면 좋았을걸. 점원도 손님이 느닷없이 '인간 국보'같은 글자를 썼으니 당황했을거야."

맞는말이다. 37p



대학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께서 데려가주신 곳은 백화점 만년필 매장이었다. 가방값을 호가하는 비싼 가격에 혀를 내두르고, 고리타분해보이는 만년필의 고풍스러운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희한하게 빠져드는 만년필 속에 본인도 모르게 심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테스트용 용지에 쓴 놀라운 글자. 그녀의 4차원 세계를 어김없이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난 만년필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니 거의 알지못한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결혼 전 신랑이 만년필을 좋아해 선물로 만년필을 사줬고, 결혼 후에도 아주 가끔 만년필 욕심을 부리는 신랑에게 사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모른다. 몽블랑이 좀 비싸다 정도밖에는 말이다. 알뜰한 신랑은 욕심이 나도, 고가의 만년필에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 정말 빠져드는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나 차 값 못지않게 고가 만년필 수집에도 열을 올린다는데, 그냥 직장에서 편히 쓸수 있는 만년필정도에 만족해주는 신랑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만년필의 이야기.

그녀를 똑똑한 모범생으로 친구들에게 보이게 했던 젊은 세대에 흔치 않은 만년필.

만년필에 마치 영혼이라도 담긴 양, 그 멋드러진 선의 흐름과 느낌 등을 전해듣고 있노라면, 과연 영화속에서는 만년필로 테스팅하는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궁금해진다. 영상에 보여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 말이다.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문구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만년필 판매 코너를 보조하게 된 호리이는 그 곳에서 특별한 손님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감정을 갖게 된다. 솔솔 피어오르는 핑크빛 로맨스에 잊고 있던 연애감정이 폴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아기엄마로 살아오다보니 나도 참 무뎌져 말이다.

첫사랑의 느낌인양, 두근거리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남자에게 뭔가 의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면서 과대해석까지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키워나가는 호리이.



워낙 연애에 서툴러 애정전선의 진전이 보이지 않고, 조급한 마음이 들 때에 전혀 뜻밖의 사람에게서 프로포즈를 받게 되고 난감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에 전 주인이 놓고간 노트 꾸러미를 드디어 꺼내 펼쳐들기 시작하는데..



옷장에서 이부키 선생의 노트를 꺼냈다.

이것이 내 최고의 즐거움이다.

노트를 펼치자 곧바로 이부키 학급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185p




사진출처: 네이버 무비


한동안 옷장이 내 방의 일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로 느껴지게 했던 전 주인의 물건. 그것은 다름 아닌 이부키 선생이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의 편지 꾸러미와 함께 말이다. 선생님이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일기 속에서, 그녀는 자신과 닮은 듯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그녀가 꿈꾸고 바라던 선생님의 이상적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부키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무척 놀랐던 것이 이렇게 인간적인, 그리고 열성적인 아름다운 선생님이 또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 또한 초등학교 5~6학년 때, 특히나 6학년때 담임 선생님을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꼽고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이부키 선생님도 반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생님으로 기억될 법 하였다.


작가가 지어낸 줄 알았던 동화같던 이야기들과 열성적인 선생님의 모습이 사실은 작가의 여교사였던 친누나의 자필 편지와 일기를 통해 그대로 소설에 투영된 것이라 하니 어느 일부분은 실화라서 놀랍기도 했다. 그래서 더 끌림이 강해지는 소설이었는지도..



이부키 선생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힘겹게 전해지는 사랑이야기에 가에도 조금씩 더 동화되고, 힘을 얻게 된다.

전주인이 놓고 간 물건. 게다가 극히 비밀에 부칠 사생활을 담은 일기장이라는데에 놀라웠지만, 4차원 소녀 가에는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펼쳐들었다가 책 속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시월애, 러브레터 등의 서정적인 영화를 연상케 했던 오랜만에 만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혹자는 이 책을 읽고 펑펑 울기도 했다는데,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커피에 적신 도넛처럼, 아주 촉촉하고 맛있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적셔졌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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