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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
전준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3월
품절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그림이고 미술이건만, 막상 전시회에 가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몰라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미술작품 감상에 대한 책들을 몇권 읽어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술작품에 대한 내 감상은 가야할 길이 멀다. 어떤 책에는 화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깊이 통찰하려 노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감상 위주로 편하게 이해하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갈망하는것은 대체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일까? 하는 요점이다.
나는 누구인가
프리다칼로의 자화상이 언뜻 보이는 이 작품은 화가 전준엽님이 설명해주시는 31편의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모음이다. 자화상을 그린 화가의 속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역사적 사건, 사실 등을 바탕으로 작가분이 재구성한 픽션의 독백이 등장합니다.) 화가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보다 더 도움을 주는 그런 책이다.
자화상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반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부터 작품의 설명이 시작된다. 그리고 고갱, 루소, 달리, 카라바조, 얀 반 에이크 등 이름만 들어도 당대 최고의 화가임을 알 수 있는 이들의 이름이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31편이나 소개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칼럼을 읽는 느낌으로 재미나게 읽고 있다가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며 책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와 이름이 같아 지역명인 카라바조로 불린 미켈란젤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작가가 서양 미술 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회화의 극적 구성이나 인물 표현에서 그를 능가하는 화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표정의 생생함은 그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는 당대에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덕분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망나니 같은 행태를 일삼았지만 용서를 받았다. 61p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이 놀랍고도 끔찍한 그림은 사실은 그의 이중 자화상이라 한다. 다윗의 모습은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것이고, 참수당한 골리앗의 머리는 재능만 믿고 방탕하게 삶을 허비한 오만하고 어리석은 자의 표정인 바로 만년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천사와 악마 그림이라고 했던가? 최후의 심판 그림이었던가? 화가가 최고로 선한 표정의 모델과 최고 악한 사형수의 모델을 각각 구해 그림을 그렸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젊은 시절에 천사의 모델이 되고, 늙어서 악마의 모델이 된 동일인물이었다는 이야기. 마치 이 이야기와 복사본처럼 닮아있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해주는 재미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배경을 검고 어둡게 만들어 인물을 빛이 나게 만들어주는 서양 회화 기법또한 카라바조가 처음 창조해낸것이라고 하니 무척이나 놀라웠다.
또한 천재적인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 중에 드물게 눈에 띄는 여성 화가 젠틸레스키가 있었다. 철저한 남성 우월주의 풍토 속에 그림을 그려낸 그녀의 작품. 그녀에게 그림을 가르치라 부탁받은 이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였는데, 그는 어린 그녀에게 1년에 걸쳐 몹쓸짓을 하고 말았다. 분노한 그녀의 아버지가 재판을 걸고, 재판에서 승리하였으나 군중과 심지어 재판관조차도 그녀의 편이 아닌 철저히 남자의 편이었다
분노한 그녀의 작품 속에그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에 비교되는 그녀의 유디트.
바로 여전사로 분장된 유디트의 얼굴이 젠틸레스키 그녀 자신의 자화상이고 목을 잘린 적장은 그녀를 강간했던 타시의 얼굴을 그대로 넣어 피렌체 시민들을 경악케했다.
통쾌한 그림의 복수.
자화상이 주는 놀라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귀족들에 비해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유명한 위인들 특히나 성경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로 자신을 살짝 그려넣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올리고, 화가의 지위 자체를 올려보고자 노력한 이들이 많았다. 혹은 과감히 작품 속에 은유적으로 자기를 그려넣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넣은 방법도 눈에 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많은 그림들을 보면서, 전부가 상상은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화가의 자화상이 이렇게 숨어있는 줄은 미처 몰랐기에 다시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대작 속에 자신을 숨겨 넣은 방법, 또 그 작품이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소개될 사람은 바로 또다른 미켈란젤로 우리가 잘 아는 최후의 심판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을 살가죽으로 표현해낸 충격적 사실이랄까. 그 누가 그 살가죽이 미켈란젤로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준 재능을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데 낭비한다는 생각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에 자신은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공포가 있었다. 예술가로 대접받으면서 살았지만 신의 영광을 증명하는 진정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삶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성자의 껍질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107p
나만 몰랐던 사실들일수도 있었지만 책 속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림 속에 묻힌 이 이야기를 살려낸 작가의 설명이 정말 고맙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최후의 심판 속 미켈란젤로의 자화상과 그 이야기를 다시는 잊지 못할 것이고, 한 천재 여성 화가의 애환이 담긴 그림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카라바조의 그림이 책을 덮고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책 속 재미난 그림과 이야기들을 같이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