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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이 책은 "고백"이라는 놀라운 데뷔작으로 이름을 알린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다. 고백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 사실상 처음 만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었는데, 존속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감정 묘사로 다뤄내 마치 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이 읽어내려갔다. 사실 감기약을 먹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태였는데도, 책의 재미에 담뿍 빠져 끝을 볼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재미있다 재미있다 하는 책은 읽어줘야한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고백"도 읽어야겠구나.
살인 사건은 우리집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카하시 씨 댁인줄 알고는 놀랐을 테지.
대체 그림처럼 행복한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까? 47p
살인사건이 난 다카하시 가족을 바라보는 엔도가족의 시선이다. 이 집은 그래도 좀 평범한 집인줄 알았는데, 웬걸. 다카하시 가족과 꽤나 대조적이면서도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 가족간의 관계가 서로 곪을 때까지 곪아버린 극에 다달은 상황이다. 엄마인 마유미가 우리집에서 살인사건이 나는게 맞겠지..하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 가족이잖아. 아무리 화가 나도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보통은 다들 그런 법이야. 사건이 나는 집은, 가령 그게 돌발적인 행동이었다고 해도 심적으로는 분명 쌓아두었던 뭔가가 있을 거야. 그런 건 아무리 숨겨도 행동이나 말 끝에 드러나는 법인데, 어째서 이웃들은 아무도 그걸 모를까? 123p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면 절대로 이해하기 힘들, 가족간의 문제.
다카하시 가족의 살인사건이 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묵묵히 참고만 살아왔던 어느 한 사람에게는 정말 끊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잔인한 일을 겪지 않더라도, 본인은 스스로를 옭아매고 죄어서 스스로 숨쉬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끌고 가는 그런 극한 상황 말이다. 조금만 너그러웠어도 숨통을 조금만 틀어놨어도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을..
"언덕길 병"
아야카가 불쑥 중얼거렸다.
"평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무리해서 살면 점점 발밑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돼. 힘껏 버티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고 말아. 하지만 그렇게 의식하면 할수록 언덕의 경사는 점점 가팔라져.... 준코 아주머니는 이미 한계였던게 아닐까?" 314p
타인과의 비교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처절한 사투가 결국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은 예의 바르고 용모도 단정하다. 동갑내기 소년은 유명한 사립 중학교에 다니고, 두 살 많은 소녀는 세련된 교복을 입고, 아야카가 떨어진 학교의 고등부에 다니고 있다. ... 하지만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흠잡을데 없는 그런 집에서 존속 살인사건이 터졌다. 가해자는 모친이지만 아이들도 지금까지처럼 변함없는 생활을 보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 점은 안쓰럽지만 아야카에게는 가치관이 바뀔 계기가 되지 않을까? 277p
의사인 아버지, 엄청나게 아름다운 미인인 어머니, 그리고 의대생인 큰 아들,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누나와 남동생까지.. 흠잡을데없이 완벽해 보이는 이 가정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다카하시 가족, 엔도 가족, 그리고 고지마 사토코. 다양한 주변인들의 시선 속에서 한 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완벽한 연결고리를 갖고, 이야기를 더욱 탄탄하게 이끌어간다. 이런 재미를 주는 작가가 또 있었는데.. 그 작가보다 훨씬 재미나게 소설을 쓰는 힘을 지닌 작가이다. 미나토 가나에.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열광했구나.
우리나라의 입시전쟁이 무척 치열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 또한 만만치 않은 입시전쟁을 치룬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정말 너무나 닮아있는 현실이었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좋은 고등학교,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마치 학교의 서열화가 진행되어 있는 것처럼 명문고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은 나락으로 떨어진듯한 비참함을 느낀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반대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자녀의 마음까지도 상세히 서술되어 부모와 자녀의 입장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그 까칠한 아야카의 만행만큼은 참, 참아주기 힘들었다. 네 속이 그렇다 한들, 네 행동은 비정상이구나 싶은 마음.
우리나라에만 있는줄 알았던 취집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소설 속 현실 또한 우리나라와 참 닮아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양, 정작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남자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의 절규. 상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그저 "결혼하기 좋은 의사"로만 바라봤던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 참 씁쓸하게 느껴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구석구석 참 세세하게 쓴 소설이구나 싶었다. 그녀만의 타고난 감각인것일까?
비극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따스함을 잃지 않는 인간미까지 갖추고 있는 소설. 어떻게 생각을 해야 이렇게 소설을 재미나게 쓸 수 있을까. 정말 감탄이 나왔다. 너무나 몰입하여 읽은 탓에, 약기운이 가시지 않아 졸리운 마당에 눈꺼풀을 비비고 앉아 감정을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재미난 책, 참 반가웠던 생각이 들어 그녀의 다른 작품들 또한 얼른 찾아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