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 겨울 여행
박정배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12월
평점 :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박정배님의 책, 일본, 겨울, 여행을 만났다. 출판사 지인분이 정말 혼자서만 갖고 싶은 보물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 아깝다고 (정말 소중한 나만의 것을 만났을 적에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 하셔서, 처음에는 웃었지만, 읽으면서 아, 정말 그 말씀에 공감하게 되었다.
표지의 작고 평범해보이는 글자, 그리고 눈으로 가득한 어느 곳인가를 혼자 걷고 있는 남자의 모습.
수십번의 일본 겨울 여행. 그리고 올해 2월 다시 한 달 동안 떠돌아다닌 여행이 내 몸속을 돌다 손끝에서 글로 흘러나왔다. 12p

몇번을 다시 본 영화 러브레터를 통해 흰눈으로 가득한 그 세상, 일본의 혹한기를 꿈꾸기도 하였으나, 역시 너무 추울 것 같았다. 그래도 꼭 홋카이도, 삿포로에 가보고 시다는 동생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일본 겨울의 참맛을 알게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세계 곳곳을 누비다 파일럿과 결혼한 전직 스튜어디스인 내 친구도 그 많은 명소들을 다 놔두고, 신혼여행도 일본 료칸, 그리고 강추하는 여행지도 일본의 료칸이었다.
많은 이들이 일본의 겨울을 꿈꾸고, 료칸에 몸 담그길 희망하는 까닭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본의 겨울은 우리가 눈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낭만과 그 이상의 것들이 가득한 '영원한 설국'이다. 그래서 겨울이면 나는 일본을 떠돈다.-표지
눈을 보다가 일본 최고의 료칸 중의 하나인 류곤이 떠올랐다.
칠년 전 니가타의 사케를 취재하기 위해 나는 니가타 현 사람들과 니가타를 돌아다녔다.
그들이 추천한 최고의 료칸이 바로 류곤이었다.
삼백년이 넘은 무사의 집을 그대로 료칸으로 고친 류곤은 일본은 좀 안다던 그때까지의 내 상식을 완전하게 바꾸어놓았다.
가마를 타고 마당의 땅을 밟지 않는다는 고급 무사들의 집 답게 안에는 가마를 내리는 장소까지 남아있는 호하스런 주택은 인공으로 지어진 연못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좁은 복도가 깊게 이어져 있다.
그 료칸의 방, 창문을 여니 개인 온천장이 마련된 별실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온천에서 나온 증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71p
|
최고의 료칸, 일본인들조차 평상시에 누리기 힘든 호사라는 그 곳을 다녀오고 나서, 그 역만 지나쳐도 황홀했던 그 밤이 다시 생각난다 하였다.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기억, 이런 료칸이라면 일생에 한번이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가고픈 심정이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막상 여행지에서는 혼자 하는 여행의 진정한 고독을 즐긴다는 저자, 그래서 취재를 위한 동행여행에서도 짬짬이 자신만의 기차 여행을 이어나간다. 취재단은 먼저 목적지에 가 있고, 저자는 한달여의 여행을 기차로 고수해가면서 일본 겨울 여행의 지치지 않는 낭만을 만끽하는것이다. 그래서인지 떠들썩하게 왁자한 여행의 느낌이 아니라, 료칸과 흰 눈에 딱 맞을 담담한 독백같으면서도 가끔 문학작품의 맛까지 느낄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표현들을 보고 있자면, 그와 함께 하는 일본 겨울 여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다자와코
마치 땅에서 눈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눈이 빠르게 쌓인다. 142p
너무 깊고 맑아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는 다자와코와 일본에서 최고의 노천온천으로 손꼽히는 쓰루노유 온천이 유명하다.
어느 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143p
드라마나 사진에서 본 것들이 실제로 보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여행지를 다닐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들 중 하나가 이런 경우인데, 이곳은 반대다.
입구의 작은 가마쿠라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노란빛과 눈들 그리고 검은색 나무 온천장과 그 사이로 난 눈길,
증기가 피어나는 아이보리색 노천온천과 그 온천장을 비추는 호롱불, 군데군데 연꽃처럼 들어앉은 사람들과 검은 산,
그리고 그 위로 내린 짙푸른 하늘, 눈송이들.
온천장 이외에 인공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 사람들 소리만이 맑게 퍼진다.
누구도 이곳에서는 행복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146p
|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나, 워낙에도 유명했다는 쓰루노유 온천. 요즘은 드라마 유명세 덕에 더욱 예약하기 힘들어진 곳이라 한다. 가보고 진정으로 다시 반하게 되었다는 쓰루노유 온천의 운치와 감동, 일본 겨울을 샅샅이, 곳곳이 여행한 저자가 반하고, 새로이 감동한 곳들에 나 또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던 일본의 촬영, 그 묘미가 가득한 명소가 소개되고 있었다.
자오, 이 낭만적인 이름은 겨울의 대명사처럼 일본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스노파우더 같은 눈으로 유명한 스키장과 얼음기둥 그리고 온천, 자오 주변의 깊은 산은 온천의 산이다.
이곳을 지나는 신칸센은 보통 기차처럼 천천히 달리고 '온천 신칸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73p
일본에서도 또다시 유명하다는 자오,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그 곳에서 또하나의 최고의 명품 료칸과 가이세키 요리를 접하게 된다. 마치 이야기 속 명소 같은 고풍스러운 료칸에서 대접받은 호사, 나 또한 너무 맛있어서 슬프다는 그 호사를 누리고 싶어졌다. 료칸 뿐 아니라 일본 겨울 여행의 진미를 맛 볼 수 있는 각 여행지에서의 먹거리 또한 풍성히 소개가 된다. 차가워 맛있다는 일본의 맥주과 따뜻한 사케에 대한 이야기는 덤으로 곁들여진다. 홋카이도에 게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먹거리로 유명한지는 몰랐다.
다카미야 료칸에서 나는 일본 여행 최고의 이자카야와 만났다.
왕의 만찬을 받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작고 화려한 방으로 가이세키 요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세심한 덴푸라 튀김, 떡으로 만든 모치, 사시미. 부드럽고 감칠맛이 길게 남는다.
재료를 살리는 기술의 완숙함.
고수다.
너무 맛있어서 조금 슬퍼졌다.
한무 속에 생야채를 넣은 한무야채와 버섯과 보리, 완두콩을 넣은 스이모노 (국),
깊고 깊은 맛이 재료 속에서 스며나온다.
저녁을 먹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1700년 전에 지어진 이곳의 온천을 어슬렁거리다 인형의 집을 보았다.
176p
|
책을 다 덮을 무렵, 흰 눈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에 놀랐다.
아름다운 설경의 사진들이 담기고, 그 안에 고혹하게 자리잡은 오래된 료칸의 교교한모습이 인상깊게 뇌리에 박혔다.
차가운 눈을 맞으며 온천을 즐길 수도 있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설경을 만끽할 수도 있고..
심지어 눈밭을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탈 수 있는 설렘까지도 전해준다.
홋카이도 지역의 시레토코샤리에서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는 시베차까지는 일반 기차가 운행된다. 디젤 기관차 기하는 투박하고 단단하고 추위에 강하다. 겨울에만 운행하는 'SL 겨울의 습원'의 출발역답게 역은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과 증기기관차, 기관사 모습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에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내민다. 253P
겨울이면 추워서 집밖에 나가기도 귀찮아 하던 게으른 나를 일본 겨울로 초대해주는 이보다 더 멋진 초대장은 없을 것 같다.
아직도 못 읽어본, 소설 설국은 이 책을 통해 더욱 만나고픈 책이 되었다. 설국을 읽고 나면, 일본 겨울여행에 대해 더욱 지독한 그리움의 몸살을 앓을까 두렵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