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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트렁커 :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
이 책을 처음 접했을때, 기우가 심한 나로써는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영화 주홍글씨와 외화 택시. 두 편의 영화에서 트렁크는 사람들이 있어선 안될 곳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곳으로도 등장하고, 또다른 영화에서는 돈이 없어 숙박을 트렁크에서 해결하는 일그러진 한국인 유학생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의심이 많고 걱정이 많았던 나는 미리 걱정을 했다. 잘못하면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을텐데.. 왜 그런 엉뚱한 일들을 할까?
엉뚱한 일을 자초하는 두 명의 주인공은 사실 범상치 않은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다. 까칠한 사차원 걸 온두는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는, 사실은 기억 못하고 사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녀의 트렁크 이웃 름은 아픈 과거를 발단 전개도 없이 바로 위기부터 고백하는 생뚱함을 갖고 있는 자상한 남자이다. 그 둘의 만남, 그리고 까칠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있는 온두의 일상과 생각, 대화 등을 읽고 보면서 처음에는 한참 재미나게 웃고 공감하였다. 다소 과격한 표현들, 하지만 그 표현들이 싫지 않고 오히려 정감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나워보이지만, 사실은 사납지 않은 그녀. 경사가 가파른 오림여고의 등교길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정말 너무나 가파른 경사를 갖고 있던 중학교 학창 시절이 떠올랐고, F자, ㅂ자, ㅇ자로 나동그라지는 아이들을 상상하며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하지만, 그 시니컬이 어쩌면 정곡을 꿰뚫고 있는지 모르는 그 모습들이 참 유쾌하게 그려졌다. 그렇게 소설 속 곳곳에 웃음의 장치가 참 많앗다.
"너를 보면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점순이 있잖니. 그 점순이가 생각난다. "
나는 동백꽃의 점순이인지 봄봄의 점순이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고추장 갖고 동물 학대하는 애 말이다. 남자애한테 추파 던지는. 걔가 보통 당돌한 애냐. 너도 그런 느낌이 든다고. "
그는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소설 속 주인공과 닮았다고 했다. 그의 이상하고 불쾌한 취미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애도 있었다.
어떤 애한테는 <감자>에 나오는 복녀를 닮았다고 해서 대성통곡하게 만들었다.
그 전날 '아다다'였던 아이가 울고 있는 친구를 위로했다. 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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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엉뚱 발랄 유쾌할 줄 알았던 이야기가 중반부터 우울하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로 흐르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과거를 잊을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감출 수 밖에 없던 진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따라 웃으면서 그들에게 너무나 미안했기에..
그들은 왜 트렁크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상처와 아픔을 게임하듯 발랄하게 고백하는 이들의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 그저 애잔하다. 조연정 (문학평론가)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열달을 보냈다. 나는 태아일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몹시 분해했고, 슬퍼했고, 괴로워했다. ..그 후 나에게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기름을 뒤집어 쓰고 2도 전신화상을 입었다. 그때의 기억을 다 잊은줄 알았던 작가가 최근에 갑자기 화상을 입었을 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꿈꾸고 놀라 일어났다고 하였다.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트라우마와의 정면 승부뿐이다. 잊고 싶은 기억과 대면하고자 하는 노력만이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온두와 름과 같은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네고 싶다는 작가의 글. 그 글에 이 글의 진심을 깨달았다.
무척 재미나면서도 범상치않고, 잔인했던 과거에 놀라웠던 글. 그리고 책을 다 덮고, 쉽게 다른 책을 금새 펼칠 수 없게 만든 그 저력은 작가의 그 진심어린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정말 재미나다. 하지만, 그냥 웃고 넘길 수 만은 없다. 그들이
진실 게임, 치킨 차차차를 통해 서로에게 풀어놓는, 혹은 온두의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열쇠를 여는 과거의 기억들이 우리에게는 충격이자, 그들에게는 치유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상처를 보듬어 안는 방법. 평범하지 않는 트렁커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가 전해주는 트렁커는 정말 황당해보이면서도 침대에서 잘 수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운 이들을 감싸안는..따뜻한 결말로 가는 소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