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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북에이드 / 2010년 10월
구판절판
368페이지의 꽤 두꺼운 이 책을 정말 단숨에 읽었다. 띠지에 적힌 놀라운 반전이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소절에 책을 읽는 내내 혼자서 반전을 궁리해보았는데, 정말 보기 좋게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맞히기도 하였지만, 맞히지 못하기도 하였기에..
일본의 많은 미스터리 소설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제 8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이라는 이 책은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가운데 수풀 속에 놓인 한대의 피아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표지를 드러내주었다.
끔찍한 화재로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단짝친구이자 사촌인 루시아를 잃고 본인 자신은 신체의 1/3 이상이 탄화되어버린 열여섯 소녀. 엄마와 제 3자의 피부를 이식받고, 사라져버린 얼굴은 뛰어난 성형의학의 힘으로 완벽하게 복구가 되었다. 하지만, 기도에까지는 메스가 닿지 않았기에 심각하게 후두부 손상을 입은 그녀의 목소리는 개구리의 그것 같은 끔찍한 목소리로 남게 되었다.
아무튼 축하합니다. 하루카양. 나도 유언 집행 업무를 오래해왔지만,
하루카 양 같은 어린 아가씨가 거액의 유산을 상속한 예는 처음이에요.
요컨대 6억엔의 신데렐라라고 할까요.
77p
자식인 아버지와 삼촌에게보다 더 많은 유산이 남겨진 손녀. 할아버지의 전 재산 중 절반이 손녀 하루카에게 남겨지고, 그 유산은 신탁 형태로 기증되어 하루카가 피아노를 치며 꿈을 성공시킬 때에만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 근육하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어머니에 의해 떠밀려 화재가 나기전 입학하기로 되어 있던 음악 명문 사립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재산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재활의 일종으로(?) 피아로에 전념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학교에 입학하자 모든 사람들의 표적인듯 눈에 띄게 되었고, 원래의 피아노 선생에게 레슨을 받으려 하자 안 그래도 시니컬했던 피아노 강사는 그녀를 가르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미사키라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그녀를 맡아 가르치기로 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강인해보이는 그 남자는 그녀에게 피아노 선생이면서 곧 삶의 희망같은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피아노에 있어서는 악마, 마법사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능력으로..

고작 몇달 전까지 옴짝달싹도 못했던 여자애가 그 곡을 쳤다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얼굴빛이 달라져서는 재활 치료를 부지런히 시작하더라.
네가 연주한 곡에 날개가 돋아 같은 처지에 있는 환자의 마음에까지 날아간거다.
네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195p
그녀를 수술했던 성형외과 의사가 하루카에게 마음을 열고 한 말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살을 하고 말기에, 그녀가 열심히 레슨을 받고 예전의 솜씨를 조금씩 되찾고 있는 것은 정말로 큰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많은 환자들에게 교훈이 되는 그녀의 모습에 주치의조차 힘을 주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아름다운 음은 한줄기 달빛이다.
소리가 빛이 되어 마음 속에 비쳐든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으니 금새 정경이 떠오르기에 또다시 놀랐다.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노라고 미사키 씨가 해설했는데, 정말 그랬다.
호수에 달빛이 고요히 쏟아진다. 그 휘황한 빛을 받으며 한쌍의 남녀가 조용히 왈츠를 추고 있다.
시간마저 천천히 흘러간다. 부드러운 바람과 잔물결이 달빛에 반짝이고, 폐허가 된 고성이 뚜렷이 떠오른다.
한 음이 끊어지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진다.
곡이 끝났을때, 나는 무척 후회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곡을 지금까지 적당히 듣고 말았을까.
선율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이토록 상상력이 환기되는 곡이었건만.
204.205p
그리고 마치 재주부리는 곰처럼 그녀를 저명한 음악 콩쿨에 내보내기로 한 학교측의 결정에 소녀는 반항할 힘 없이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시도였지만, 학교는 무리하게 그녀를 이용하려 하였고, 부모님들은 그녀가 학교 대표로 선정되었음을 너무나 감사하며 기뻐했으니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선 진출곡은 드뷔시. 소설 중간 중간 음악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음악을 듣는 것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듯 하였다.
청각을 시각화하다. 귀로 들리는 감동의 순간을 이토록 생생하게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상만 하는데도 벅찬 나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뛰어난 강사를 곁에 두고, 피아노 레슨을 받던 그녀에게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어머니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누군가에 의한 살해로 보이는 죽음. 그것은 자꾸만 하루카를 노리는 일련의 사건들과도 관련이 있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지도록 테입이 떨어져있고, 목발이 한쪽만 고의적으로 조작이 되어 높이가 맞지 않게 되었던 것. 심지어 골목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고의로 밀고 달아나기도했다.
6억엔의 신데렐라. 재산을 노리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의 목숨을 노리는 그 무서운 존재로부터 아직도 재활중인 소녀는 버겁고 두렵기만하다. 하지만, 그녀가 의지할 단 한 사람, 미사키 선생.
나도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있었다.
가족을 잇달아 잃고, 피부와 목소리를 잃고, 신체의 자유마저 빼앗겼다.
잃은 것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재활 치료가 끝나도 팔다리의 장애는 남을 것이다.
그러기에 잃은 것 대신 새로운 뭔가를 얻고 싶었다.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 나에게만 허락된 재산을 갖고 싶었다.
그것이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을때 나는 목소리 이상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말 이상의 말로 이야기한다.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때는 꿈같은 이야기였던 마법이 지금은 미사키 씨가 끌어내 준 가능성 덕택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314p
신데렐라 소녀에 대한 주위의 날이 선 시선, 그리고 집안 누군가가 재산으로 인해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 무엇보다 가슴아픈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프랑켄슈타인처럼 갈기갈기 조합된 그녀의 피부와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 감당하기 힘든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안되면 끝까지 노력해서 이겨내라는 할아버지의 생전 말씀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10분을 버티지 못하는, 단 8분 동안의 연주 실력만으로 콩쿨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그녀의 개인 교습 선생인 미사키 선생조차도 그녀의 완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 덧 책의 결말인 그녀의 콩쿨 장면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지금도 살짝 소름이 돋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정말 충격을 받았기에..
미스터리란 이런 것일까? 힘겨운 희생 속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성장드라마를 쓰면서도 독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장치를 살짝 해놓는..
그리고, 중간 중간 궁금했던 그것들을 해결해주는 그 깔끔함.
어영부영 말을 흐리며, 미스터리하지도 않은 글을 미스터리한 척 서둘러 마무리하지도 않는다. 정확히 콕 집어 살짝 떨리는 전율이 오는 그 결말을 전해주면서..
눈으로 읽었던, 그리고 머리로 상상했던 그 음악을 같이 듣고, 공감하라며 멋진 드뷔시의 음반까지 같이 선물해준다.
주인공 하루카와 함께 범인을 예상하며, 의외의 범인(반전이라니.)이 누굴까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내머리를 살짝 때려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