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구판절판


쉴새없이 넘어가는 책장들, 꽤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한번 펼쳐드니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숨막히는 시간들이 술술 넘어가듯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이런 세상이 있었나.. 그들은 별천지에 살고 있었고, 나는 그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아주 가끔 신랑이 해주는 이야기(어디 인터넷 뉴스나 정보에서 접했음직한)를 들으면서도 에이, 설마 그럴리가 있겠어? 하며 나는 그 천문학적인 (내 기준으로는) 대기업 임원진들의 연봉에 혀를 내두르며 거짓말이라 생각해왔다. 그럴리가 없어. 허풍이겠지. 어쩌면 그렇게 큰 돈을 연봉으로 받을 수가 있는 걸까? 억, 십억, 백억.. 이 책에는 숫자놀음으로만 생각했던 무한한 액수의 돈들이 마치 수퍼마켓 계산기의 숫자마냥 찍어져서 나온다.

그리고 국가급 재정에나 나옴직한 조라는 단위까지도..



정체를 알기 힘들었던 숨막히는 술수들의 경합. 그리고 새로이 창설된 일광 그룹의 문화개척센터. 그 중심에 놓인 세 명의 핵심 멤버,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 그들이 다루는 돈의 단위는 조라는 단위에까지 이르렀다.





돈은 단순히 위조하기 어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쪽지가 아니었다.

그건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었고, 그 무엇이든 굴복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는 괴물이었다.

128p








환타지도 이보다 더한 환타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만큼 믿기 힘들었던 이야기. 소설이고, 허구라 명명되었지만 분명 그렇게 덮어두기에는 너무나 큰 그런 대기업, 재벌가의 이야기가 낱낱이 공개되어있는 놀라운 소설이었다. 돈으로 할 수 없는것, 살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서민들이 가장 믿어마지않던 언론마저도 그렇게 철저하게 매수당해있었던 것이다. 대기업이 포장해놓은 그 모든 것들에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그대로 세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몇 사람들은 지각있게 행동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작된 이미지를 그대로 믿고 따라하는 허수아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마천이 했다는 말, 자신보다 만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

아내는 영락없이 그 지경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아내는 회장님을 향한 노예의 황홀경에 취해 나날이 마냥 행복하였다.

회장님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 분명한 구세주이니까.

156p



대통령보다도 높은 황제, 옛날 이야기에나 있을 법한 그 분들은 현재에도 존재했다. 드라마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고 우리가 사는 많은 제품에 찍혀있는 마크의 주인공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삶, 그 이상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감히 우리같은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세계말이다.





일은 우리가 골빠지게 했는데 돈은 왜 엉뚱한 놈들한테 퍼다 주는가,

사원들은 이런 반감에 찬 이유를 분명히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정당한 이유를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월급쟁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곧 월급쟁이의 한계고, 비애였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면 그것이 곧 목숨 줄이 끊기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게 법에도 뭐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월급쟁이의 차디찬 현실이었다.

187p








직장생활 할적에 왜 월급쟁이들만 유리알 지갑이냐며 울분을 터뜨리곤 했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 기업의 생리임을 짐작은 하면서도 이렇듯 조직적인 규모로 엄청나게 벌어지는 일들인 줄은 몰랐다. 오늘도 뉴스에 올랐던 모 그룹의 비자금 이야기. 마치 조정래님의 허수아비춤을 보고 있는 듯한 생생한 중계 현장이었다. 소설 속 이야기가 허상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어 주는 이야기. 그리고 소설 속 조라는 단위가 거짓이 아님을 뒷받침해주는 놀라운 뉴스 기사.


돈으로 안될일은 없었다. 그들은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도 돈으로 구워 삶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권력과 돈으로 유혹하고.. 얼마의 돈이 되었듯 그들이 배팅하는 숫자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직 검사인 전인욱과 해임 교수 허민. 재벌에 맞서는 용감한 자들은 무서운 칼바람에 잘려나가는 말 그대로 한 포기 민초같은 존재들이었다. 국민들을 위해 서 있으나, 국민을 위해 애쓰기 힘든 앞날이 어두운 그들의 작은 발악.



그들의 노력을 희망적이라 보기에는 힘든 무사안일주의에 너무 젖어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우리도 모르게 너무 많이 파악당해버린. 그리고 그들의 허수아비가 되어 오늘도 새를 쫓는 헛웃음질을 하고 있는 비겁한 현실 속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에서 재물욕이 생생히 살아있는 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세력에게 충성스럽게 자발적 복종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4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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