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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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P의 평범한 두께의 책 한권에 이토록 방대한 양의 역사와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혹자는 열권의 대하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대한민국 강남 형성사가 이 책 한권에 압축되어 있어 놀랐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럴만하였다. 비단 강남 형성사 뿐 아니라 삼풍백화점 붕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제시대부터 권력에 힘입어 막대한 부를 형성한 정권 세력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책 한권에 오롯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도. 이 멍해지는 기분 나쁜 느낌을 어떻게 지워낼 수 있을까 싶었다. (책은 재미있었으나, 이 모든 것이 허구이기를 바랬다. 기분나쁘다 함은 바로 그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동안 눈가리고 아웅하기 식으로 덮어만 두었던 많은 역사적 진실들이 저자의 입에서 너무나 상세하게 술술 풀려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강하게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난 우리 세대는 과자봉지 하나에도 "멸공통일"이 새겨진 것을 보며 자랐다. 좌익은 무조건 전쟁을 도발한 빨갱이였고, 너무나 무서운 간첩인줄로만 알았다.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간첩을 만났을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등의 내용이 실려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이승복의 입을 찢는 무시무시한 영화를 (지금 봐도 소름이 끼칠..19금일 그런 영화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걸러짐 없이 그대로 상영되었다.) 대강당에 모여 관람하며 차마 너무 무서워 눈을 못 뜨기도 하였다.

 

책에는 총 다섯 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룸싸롱 출신으로 거물인 김진의 후처가 되어 막대한 재력을 소유하게 된 박선녀, 친일파부터 미군 정보부를 거쳐 모든 정권에 붙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땅에 투자하여 상상할 수도 없는 힘과 재력을 지닌 거물 김진, 강남 형성이 시작되던 한창 때 부동산에 심취했던 심남수, 어둠의 보스로 나이트클럽과 다양한 범죄조직에서 힘을 발휘했던 홍양태, 평범하다기 보다는 너무나 어려운 가정형편에 철거민들을 위한 딱지도 발급받기 힘들었던 가정의 자녀였던 임정아.

 

 다섯 명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 또 그 주위에 다른 인물들까지 얽혀, 거미줄같은 이야기가 하나의 강남 이야기, 그리고 삼풍 백화점 붕괴의 이야기 (책에서는 대성 백화점 붕괴라고 나온다.)로 귀결이 된다. 1995년 강남 최고의 백화점이었던 삼풍 백화점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서 끔찍하게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폭싹 주저앉아버린 그 삼풍백화점의 참사는 연일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였고, 너무나 무서웠던 그 시기에 고3이었던 나도 많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어도 그 이듬해부터 10여년은 서울에 살게 되었기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그 당시 그저 우리나라 최고의 부유층이 사는 강남의 백화점이 무너진 결과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맞추고,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대로만 이야기를 전해들었을뿐.. 작가가 조명하고자 하는 한반도의 지난 세월과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계해서 이렇게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고 싶었던 진실.. 눈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적나라하게 알아버린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그 진실들에 나는 오한이 들 정도로 떨렸다.

서민들은 올려다보기도 힘들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기회를 포착하거나 만들어낸 사람들이라는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힘의 균형에 의지해 약삭빠르게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다소 허탈해졌다. 그 중심에는 김진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말이다.

 


 

토오꾜오 미군 사령부 GHQ에서 인수인계 작업을 보좌하러 보낸 일본인 문관이었다. 그가 서로 친숙해진 뒤에 이희철과 작별하면서 남긴 말은 그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한마디였다.

조선반도는 이제부터 일본과 함께 미국의 지휘 아래 대륙을 견제할 최일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한몸입니다.

90P

 

뒷장의 항의성 투서는 몇몇 장교가 연서한 것으로 과거에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민족반역자가 어떻게 신생 조국의 국군 창설에 등용될 수 있는가라는

매우 당연한 의견이었다.

미군- 글쎄, 우리는 그가 정보요원이었기때문에 미리 알아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쎄일즈 경험이 많은 자가 물건을 더욱 잘 팔 거라고 예상하는게 당연하지요.

김진 -물론이지요. 최소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게 분명하군요.

미군 - 우리는 상관없어요 그건 당신네들 일이 아닌가요?

123P



 

다른 이들의 이야기보다 김진의 이야기가 길었던 것은 그 한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진, 이희철, 김창호 등의 세 친일파들이 박쥐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서였고, 또 그들의 세상이었던 해방이후, 그리고 군정 시절 등의 슬픈 우리 서민들의 학살에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제주 양민 학살 사건, 광주 진압사건 등이 다뤄져 있었는데.. 특히나 잘 알지 못했던 제주 양민학살사건의 전모를 짐작하고서는 소름이 끼쳤다. 조작된 진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무고한 이들이 죽음을 당했느냐에 그들은 아마 죽어서도 죄가를 치루지 못할 것 같았다.

 

을사오적이 아닌, 대한민국 3적같은 이 중 하나인 이희철의 경우 나중에 큰손인 장영숙을 만나 정말 호화방탕한 삶을 누린다. 요즘 기준으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인데, 그당시 기준으로 생각하자면..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들은 한달 생활비와 접대비에 당시 돈으로 삼억 오천만원, 하루 평균 천 이백만원을 썼다. 사십평대 아파트 한 채가 오륙천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184P

 

박선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을 부동산 큰손 심남수의 이야기에서 강남 형성사의 진면모가 밝혀졌다. 심남수가 부동산에 입문하는 과정에서부터, 한강 이북에 치중되어 있던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려는 개발 계획이 실상은 이미 정보를 접한 많은 이들의 재산을 불려주는데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말이다. 개발, 도시 계획, 부동산.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들인 줄 알았고, 정말 딴 세상 이야긴 줄 알았던 것들이 지금의 어마어마한 강남 형성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떼기>가 뭐예요"

"일단 맞춤한 땅을 계약하면 인감증면 효력기간이 삼개월이니까 그동안 땅문서를 돌리는거야. 한바퀴에 평당 오백원에서 천원 떼기만 해도 짭짤하지.

요지는 데도리해서 우리가 샀다가 경쟁을 붙여서 올려놓을 수도 있구 말야. "

220P

 

주인호가 운명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그 보름 전 쯤이었다. 서울시장이 막 개통된 제 3한강교 주위를 둘러보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231P

토지 매입이 어느 정도 끝난 다음에 서울 시장은 남서울계획의 전모를 발표했다. ..나날이 과밀화되는 구 시가지의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대서울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남서울 개발을 급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235P

 

바로 그 일년뒤에 박기섭의 우정건설은 과다한 부동산 투자에 따른 은행 부채로 부도를 맞는다.

속도의 제값을 치렀다고나 할까?

242P



 

속도의 제값을 치루다. 작가가 은연중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인듯 하였다.

읽어내리는 동안 정말 숨차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석영님의 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많은 이야기들의 진실을 짐작해볼 수 있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기도 하였다. 삼풍 백화점의 붕괴로 저자는 우리에게 길고 긴 한반도의 슬픈 근대사를 다시 전해주는 듯 하였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상류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현실세계가 어째서 변해야 하는가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강남몽이라고 정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2010년 6월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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