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1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박환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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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문학소녀로써의 운치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보지 못한 나로써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이름을 아주 가끔 단편단편의 시나, 글귀 구절 들을 통해 만났을뿐이었다. 그래도 그 분이 정말 유명한 시인이라는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뻣뻣하고 재미없는 (문학적 재미가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난 이후에도 난 시를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릴케 시집을 따로 읽거나 하지 못했는데, 라이너 마리아 릴케님의 작품 중에 장편 소설인 "말테의 수기"라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고 드디어 읽게 되었다. 시보다는 소설을 좋아하기에 소설로라도 꼭 위대한 작가분의 작품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기, 에세이 형식으로 씌여진 작품이라 소설이라고 해도 좀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말테라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였으나 실제 릴케의 과거 이야기인 듯한 느낌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잉게보르크라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잃고 슬픔에 젖었던 어머니, 그리고 말테를 소녀처럼 대하고, 말테가 소피라는 가상의 딸 흉내를 내면 어여삐 여기고, 그 아들과 함께 말테와 일반 남자애들 흉을 보곤 했다는 어머니..

실제 릴케도 어릴적에 첫딸을 잃은 어머니가 릴케를 여아처럼 대하고, 입히고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말테의 이런 어릴적 모습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리라. 너무나 사랑하는 한 아이를 잃은 슬픔이 지나쳐, 남은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어머니. 그리고 그 슬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견뎌냈어야 할 릴케의 여린 마음이 전해지는 듯 했다.

그가 어릴적에 본 유령의 "손" 그리고, 외가댁에 가서 본 흰 옷을 입은 유령여인(한번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아주 여러번 본..일상의 유령), 어머니께 들은 누나의 유령..
책 속의 말테는 강인해보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약해보이는 느낌.
그래서 책의 시작에서도 그는 죽음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과 유령..임산부의 배를 보고서도 생명과 죽음 두가지를 잉태하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 느끼고 이야기하였다.

줄거리가 일관성 있게 이어지는 그런 느낌의 작품은 아니었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두서없다고도 할..
고전이고, 대가의 작품이니 한낱 21세기의 내가 평가하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실 수 있을텐데.. 그저 그 분의 작품을 하나의 맥락, 큰 틀로 이해하기 보다 단락단락 구절구절의 그 세세한 묘사와 설명으로 이해하는게 더 받아들이기 쉬웠다.

마틸데 브라에의 얼굴을 매일 대하게 된 후로 나는 죽은 어머니가 어떤 용모를 하고 있었는가를 비로소 생각해 냈다.... 그 무렵에 처음으로 어머니의 모습이 무수히 작은 인상으로부터 조립되어, 지금은 어디엘 가나 내 마음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다. ..단지, 브라에 양의 얼굴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파고들어가 그것이 이목구비를 서로 떨어지게 하고 비뚤어놓고 흩어지게 만든것 같았다. 32p

릴케의 표현은 정말 새롭다. 책을 많이 읽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해서인지 그저 아름다운 장면, 아니면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보아도 아~ 하는 감탄사 이외에 표현해낼만한 적절한 어구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나와 달리.. 그의 표현은 하나도 겹치지가 않고, 지금 읽어도 몹시 새롭고 매력적이다.

몇백년동안 여자들은 사랑의 작업을 혼자서 도맡아왔다. 사랑의 대화에서 1인2역을 맡아왔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것도 서투르게 말이다. 남자의 산만함과 무신경, 역시 일종의 무신경인 질투는 여자들의 진실한 사랑을 터득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낮이나 밤이나 쉬지않고 계속 사랑하여, 사랑을 깊게 만들었다. 148p

사랑의 대화에서 1인 2역이라..
어쩐지 요즘의 우리 부부 모습 같아서 뜨끔하였다. 다른 부부들은 좀더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지 않을까 싶은데..자상한듯 하면서도 사랑 표현에는 서툰 우리 신랑은 마치 앵무새처럼 내가 한말을 따라한다. 그것도 정말 무성의하게..
그 앵무새 같은 표현이라도 듣고 싶어서..나 혼자 1인 2역의 대화를 해왔는데..

남자인 릴케.. 그것도 나보다 100년전에 살았던 바로 그 분이..정확히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다.
우리 신랑.. 혹시 과거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요즘 남자들은 좀 많이 달라졌을텐데..

"나는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창 앞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어두운 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별들은 곧 자유였어요."
그 무렵의 아벨로네는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이 든다는 표현은 그 무렵 아벨로네 또래의 처녀들에게는 걸맞지 않았다. 그 소녀들에게 잠은 몸과 함께 떠오르는 것으로써 이따금 눈을 떴다가는 다음 잠의 나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맨 위에 있는 나라까지는 아직 몇개의 나라가 더 있었다. 그러고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날이 새지 않은 새벽녘 두자루의 촛불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순결한 어둠 속에서 켜지는 등불, 바로 아벨로네 한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중3때 친구와 함께, 오빠에게 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도시락 까먹은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가 깜짝 놀라며 순수해보이는 여학생들이 그런 일탈 행동을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그게 뭐 어떻냐고 했던 기억이 났다. 매일 보는 동생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여학생들은 좀 달라보였나보다. 대학생인 오빠도 순수한 마음으로 여학생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을텐데..우리가 아주 무참히 그 순수한 상상을 깨주었던 기억이 난다.
말테, 그리고 시인 릴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처녀의 잠, 여인의 잠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일거라고..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처녀의 잠은 이토록 아름답고 숭고하다.
아니라고 내가 또 반박한다면..나만 또 뻣뻣한 사람이 되는 거겠지..
어쨌거나 릴케의 표현 속에서는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 듯 하고, 향기로운 장미 한송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 그대에게 말하지 않으려네
밤새 울면서 누워 있음을
요람을 흔들듯
내 마음 흔들어 아프게 하는 그대여
그대, 단 한번도 말하지 않네
나도 너 때문에 잠들지 못하노라
아름다운 이 마음 언제까지나
그대와 내 가슴에 숨겨 둘 수 있을까?

세상의 연인들 좀 보아,
겨우겨우 그 사랑을 꺼내고도
게눈처럼 그 마음 감춰버리는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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