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대학 불패학과 명량대첩
노병천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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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일본군은 1597년 1월부터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 제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제2군에 세워 조선의 재침략에 들어갔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길에 오른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장군이 내부의 모함으로 인해 백의종군을 하는 사이 조선수군이 ‘칠천량 전투’서 크게 패전하여 장병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우리나라의 장비와 화력은 물론, 군수물자까지 바닥이 난 위기의 상태에서 치러야 했던 전쟁이었다. 1597년 9월17일 전남 울둘목. 일본의 정예함선 133척이 바다를 덮었다. 예비함대 70척도 뒤를 따랐다. 조선의 수군은 13척으로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싸움에서 100척 이상의 일본 배를 침몰시키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의 큰 국면이 뒤바뀌는 상황을 맞았다. 그 당시 민심은 흉흉하고 경제도 어려워 백성들이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백성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왜군들에게는 두려움을 심어줘 위기를 기회로 역이용하는 능력을 보였다.

이 책은 육군대령 출신의 병법전문가가 26차례에 걸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투 중 명량대첩의 역사를 집중 조명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빠른 결단력이 필요한 전장에서 어떻게 지휘했는지 불패 전략을 통해 현재 기업가가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어떤 덕목과 지혜,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지 제안하고 있다. 난중일기 등 기록에 나타난 사실을 기반으로 엮은 글이 생생하다. 명량대첩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충무공이 미리 매복해 기다렸던 싸움이 아니라 왜구의 기습으로 시작됐고, 일자진과 거북선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경영인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면모는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직할부대만 통상 1만7,000여명. 피난민까지 수만명을 먹여 살리며 전투에 임했다. 충무공이 영국의 넬슨이나 일본의 도고 등 명제독들보다 몇 단계 위라는 점도 직접 함선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며 싸웠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순신대학 불패학과를 개설했다. 이순신대 불패학과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필수전공으로 명량대첩, 한산대첩, 노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을 첫 과목으로 확정한 이유는 첫째,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명량대첩이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말 많은 독도가 이순신이 지켜낸 땅이라는 사실이다. 셋째, 명량대첩이 대단한 해전이며 이순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올라가면 부하와 백성의 마음을 꿰뚫고 이해했던 그의 한반도 최고 전쟁 리더십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행동하는 수평적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전장에서 항상 그는 적지에 먼저 들어가는 솔선수범을 보였으며 그 모습은 장병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도록 용기를 준다. 백성들과 부하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으며 민심까지도 잃지 않았던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난중일기> 진본의 글을 실어두어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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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물명 2012-01-2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데 이순신은 그 대첩보다 한산대첩,옥포대첩,사천대첩,당포진대첩,명랑대첩,육상대첩등이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