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에 담긴 빛나는 서정성, 삶에 대한 관조의 시선은 한 구절의 참언을 읽는 것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순천의 선암사 해우소에서도 그의 잠언 같은시구를 접할 수 있다. 어쩌면 탈속(俗)의 경계인 승선교보다 해우소는 속인인우리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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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생소했다. 자신의 목숨을 사용한 그 글이 읽고 싶어졌다. 무엇엔가 목숨을 걸고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이지않을까라는 생각을하니 행복한 맘으로 쓴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치료받기엔 좀 늦은 것 같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글 쓰는 데 쓸란다. 한번 입원하면, 다시 책을 쓰긴 어려울 거다. 암 치료받기 시작한 작가들 결국 소설다운 소설 못 쓰고서…. 작가가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가치가 있겠나. 그리고 꼭 써야 할 작품이있다."

위의 말은 작가 복거일의 말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말이 아니라니. 
정확히 말하면 자가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의 말이다.
부연하자면 복거일이 최근 펴낸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라는 장편소설에 나오는 현이립이라는 주인공이 한 말이다.
역시나 그는 작가였다. 자신이 암에 걸렸고, 치료를 거부한 채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핏 작품 속 화자의 말은 액면 그대로 소설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봐도 무방하지만, 그러나 그의 작품 성향을 아는 이들이라면 현이립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게다. 소설의 인물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떠올리지 않아도 복거일의 경우는 소설의 인물이 작가의 분신인 경우가 적지않은 편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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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에는 시간을 들인 만큼의 깊이가 있는것같다. 잘은 모르겠으나 평범한듯 비범하다고 해야하나. 생각이 많아지는것이 그 증거일듯하다.

그의 고심은 소설적 에너지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로 집약된다. 문장과 형식에 밀도와 진정이 투영되었는지, 말의 연쇄가 이뤄내는 울림이 객관적인지,
만약 충분히 에너지가 응결되지 않으면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린다. 어차피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창이다. 창 너머로 실체가 보이지않는다 해도 기다림은 배반하지 않는다.
성석제는 단순히 작가가 아니라 예술가의 심성과 감각 그리고 세계관을 가진 휴머니스트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그 세상은 다시 책으로 환원된다. 작가는 책을 쓰고 책은 작가를 만든다. 성석제를 만든 건팔할이 책이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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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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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조정래 작가의 이야기다.
문학계의 거목이 된 지금도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경외심을 느낀다.

그는 소설의 첫 문장을 쓸 때마다 파지만 30여 장을 버린다. 그렇게 해서 닻을 올리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기나긴 여정이 남아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원고지 한 장은 불과 1만 50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1만 4999를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글 감옥에 갇혀야 한다. 세상과의 완벽한 고립 없이는 도저한 문학의 강을 건널 수 없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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