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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평점 :
초등학교 교사이신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시고 그림 또한 매우 잘 그리신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머니와 함께 그림을 자주 그렸었다. "엄마, 바다는 파란색으로 칠해야 해? 꽃은 빨강색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색을 칠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바다는 파란색으로만 칠하는 게 아니란다, 아가야. 많은 색이 섞여서 바다색으로 보이는 거야.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색으로 채워볼까!", 라며 내 생각의 한계를 없애주셨던 어머니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무지개색 바다를 완성했다.
"무엇이 푸르냐고 나에게 묻지 말라. 그대가 푸른 것이 곧 진실이다."(P.47) 이 문장을 읽고 나와 어머니의 일화가 떠올라서 한참을 행복감에 젖어있을 수 있었다.
1946년생인 작가 이외수는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들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외수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해 본적이 없었다. 당연히 보여지는 겉모습만을 통해서 나는 그의 작품색이나 경향을 상상했고 그것은 나의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아불류 시불류』를 읽고 내 마음대로 그를 규정지은 것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60이 넘은 나이이지만 의외의 소녀적 감성이 풍부한 면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재기가 넘쳐서 웃음을 주기도 하고, 족집게처럼 콕 집어 현 세태를 비판하는 글에는 날카로움이 배어있어서 뜨끔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게다가 부드러운 감성으로 도배되어 과연 이 글을 60이 넘은 남자가 썼는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백의 미가 한껏 살아 숨 쉬는 정태련 화백의 그림은 마음의 여유를 찾게 도와주고 작가의 글을 여러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톡톡히 해낸다.
나는 활자가 많지 않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의 빈공간은 낭비 같아서 아쉽고 왠지 그곳에 활자를 빽빽이 채워넣어야한다는 대책없는 의무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불류 시불류』의 여백에는 나의 여러 가지 많고 많은 추억이 숨어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외수의 꾸밈없고 담백한 문구를 하나씩 읽고 있노라면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부끄러웠던 일 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젊은이, 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절대로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아까부터 줄곧 나를 이회수 씨라고 부르는데, 제발 그것만은 삼가주세요."(P.116) 피식 웃음이 나는 가운데에서도 조용히 힐책하는 듯 한 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일부러 깨달음이나 교훈을 얻으려고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아불류 시불류』를 읽고 나면 저절로 생성된 "무언가"가 느껴질 것이다. 나에게 그 "무언가"는 잊고 있었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