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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나간 날들에 대해서 아련한 후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남아 있는 나날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평생을 집사로 지낸 한 남자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무언가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스티븐스는 유능하고 충성스런 집사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집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살아온 인물이다. 대저택 달링턴 홀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후, 집사인 아버지와 함께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을 주인으로 섬기며 달링턴 나리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달링턴 홀 이외의 세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택의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가 그에게 여행을 권하지만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조차 없는 그는 주인 어르신의 권유가 달갑지 않다. 하지만 20여 년 전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스티븐스는 자신의 첫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남아 있는 나날』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여행을 하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완벽한 집사가 되기 위해서, 집사의 '품위'를 체득하기 위해서 스티븐스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집사로서 최선을 다했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런 그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는 스티븐스의 과거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의 역경과 고난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는 대단한 인간이 아닌 불쌍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로지 집사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사적인 것들을 포기한 사람이 스티븐스,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친나치 일당의 정치모임을 수발하기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하지 않았다. 또한 집사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온 켄턴 양을 밀어내버렸다. 아들을 향해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의 차디찬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한 아들!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진정으로 마주하고 있지 않는 이 장면은 스티븐스가 얼마나 불쌍한 인물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켄턴 양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마음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한다. 결국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도 그녀를 잡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이 표정으로 드러나 버린 그 순간 역시 그는 진정 불행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작가는 무언가 한가지에만 치중하다가 나머지를 놓치는 삶은 온당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직업에만 자신의 평생을 바쳐온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지워버리고 살아온 인간이다. 스티븐스는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는다. 이제껏 그가 살아온 과거에 대한 정당성을 무한반복한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도 미봉책일 뿐 탈출구는 아니다. 눈을 뜨면 현실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스티븐스는 생면부지 60대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족했던, 아니 자신에게 용인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작가는 독자가 앞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갈 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하지만 독자는 이 작품의 제목처럼 스티븐스가 지나간 나날보다는 '남아 있는 나날'을 행복하게 살아가길 희망하게 될 것이다. 그저 지독히도 외로운 한 남자가 남은 날들은 조금 덜 외롭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