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어찌보면 매력적인 이야기를 뿜어내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시리즈로 유명한 더글러스 애덤스는 불행하게도 10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서야 『히치하이커』시리즈를 접했고 더 이상 더글러스 애덤스의 이야기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매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그의 88년도 작품인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움을 뒤로 한 채,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작품을 읽어내려 갔다. 읽은 분량보다 앞으로 읽어나갈 분량이 점점 줄어듦에 아쉬움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런 작품이었다.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은 인간과 신의 이야기이다. 한없이 전지전능한 신과 한없이 미약한 인간이 등장할 거라는 나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리넨(직물)에 마음을 홀딱 빼앗긴 신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을 통제․이용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통속적인 신과 인간의 관계가 제대로 뒤집혀져 있는 것이다. 신에게 영혼을 판 인간이 아니라 영악한 인간에게 불사의 영혼을 판 무능한 신이다! 깨끗한 리넨을 얻기 위해서라는 하찮은 이유 때문에 이 계약은 성립되었다.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에서 작가는 신은 인간에 의해서 태어나고 힘을 부여받으며 전성기를 이루고, 인간이 원치 않으면 결국 쇠락하여 신도 인간도 아닌 미물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로 그린다. 또한 인간의 더러운 욕망은 타락한 신마저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더크 젠틀리의 냉장고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라 할 수 있겠다. 3개월 동안 열어보지 않고 꽁꽁 닫아뒀다가 결국에는 새 냉장고를 들이면서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버려진 냉장고에서는 끔찍한 신이 생산된다.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에서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방망이와 콜라 자판기를 들고 다니는 막무가내 천둥의 신, 토르 ;
 "지천에 널린 돌멩이의 개수를 세어 본 적이 있는가! 세워보지 않았다면 말을 하지 말거라"
약속시간을 어겨 의뢰인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게 만든 원인 제공자, 사립탐정 더크 젠틀리 ;
 "저 놈의 냉장고를 어떻게 한담!"
리넨을 갖기 위해 음료광고를 찍는 신의 왕, 오딘 ;
 "리넨과 간호사 없이 본인은 살수가 없느니라."
토르와 오딘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오지랖 넓은 여인, 케이트 ;
 "신이든 인간이든 남자라는 족속은 모두 정신이 나갔어!!"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을 갖고자 신을 이용하고 조롱한 간 큰 여자와 남자, 드레이콧 부부…… ;
 "안락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럼 여러분의 가정에 무능한 신 한 마리 들여보세요."

얼렁뚱땅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탐정 더크 젠틀리는 능력이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그냥 아저씨이다. 그는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에서 독자의 길잡이역할을 한다. 여타 소설 속의 탐정은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사실과 비교했을때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의 더크 젠틀리는 그의 매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 아쉬웠다. 작품의 전체 분량에 비해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들이 많아서 젠틀리만의 매력을 발산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임에는 확실하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유쾌발랄한 문체는 독자를 즐겁게 해 준다. 작가만의 톡톡 튀는 문장은 책 읽는 속도에 가속을 더해준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끝없이 뱉어내고 독자는 열심히 귀 기울이게 된다. 또한 88년도 작품이라서 그랬을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두어 번 나온다. 그리고 더크 젠틀리가 서점에서 계산기를 사는 장면은 영미권 작가가 당시에 한자 문화권에 관심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사용하지 않는 호텔(인간세상)에서 오딘의 궁전인 발할(신들의 세계)로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해리포터의 "9와 3/4승강장"이 떠올라 매우 인상 깊었다. 혹시 롤링이 이 작품을 보고 "9와 3/4승강장"의 모티브를 가져온 게 아닌가 싶었다.

천둥의 신은 구름 위가 아닌 콜라 자판기를 들고 거리를 거닐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토르는 왜 무거운 콜라 자판기를 들고 다니는 걸까, 궁금했다. 그리고 콜라 자판기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론적 사립탐정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었다.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은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깜찍한 소재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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