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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스토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설일 줄이야!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의미의『심플 스토리』였다.
어느 날, 뉴스에서 우리집 담장보다 조금 더 높고 기다란 담벼락을 부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어린 나는 "엄마, 저 사람들 왜 저래?" 라며 호기심과 궁금증에 물었다.
어머니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통일하게 되서 이제 더 이상 저 담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독일통일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내게 처음으로 인지시켜 준 사건이 되었다.
『심플 스토리』는 독일통일 후 동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스물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인물 역시 많은 에피소드의 개수만큼 다양하다.
특별한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형적인 구성도 아니다. 매번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르다. 그 인물들마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은 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은 부수적인 구성 소재일 뿐이다. 또한 엉킨 실타래처럼 '구성 소재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작가 귄터 그라스에게 "타고난 젊은 이야기꾼"이라고 극찬을 받은 잉고 슐체는 그 명성 그대로 여러 화법을 작품에서 활용하고 있다. 일인칭 시점의 여성적인 어조로 사용하다가 다른 장으로 넘어가면 삼인칭 시점의 남성적인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화법을 따라가는 것은 일관된 시점의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로써 매우 힘이 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흔한 독일 인사조차 모르는 무식쟁이인 나에게 많은 인물들의 이름은 작품을 읽어 내려가는 속도를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서독 위주의 통일 아래에서 동독인들은 흡사 지금 우리의 88만원세대를 닮아있다.
경제위기 이후 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주위만 겉도는 88만원세대와 통일 이후의 모든 방면에서 기존의 동독의 것들을 인정받지 못한 동독인들은 "부적응자들"이다. 슬프게도 우리와 그네들의 상황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등장인물과의 공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듯하다. 만약 여기까지가 작품의 끝이었다면 무뚝뚝할 정도로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잉고 슐체라는 작가를 나는 부정적인 사람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적응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적응하려는 자"도 있다고 말한다. 작지만 조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살려두면서 『심플 스토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끝을 맺는다. 잉고 슐체, 그는 다행히도 부정적인 작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심플 스토리』를 읽으면서 (내 입장에서) 나는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한 독일 이름을 종이에 쓰고 이름만으로는 그 성별을 구별하기가 어려워 성별까지 기입하였다.
한번 등장했던 인물들이 재차 등장하였기에 그들의 이름과 성별을 메모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포기할까?'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중도포기를 할 수는 없었다. 스펙터클한 사건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심히 부족하여 『심플 스토리』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심플 스토리』는 오래두고 마시는 술처럼 여러 번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깊은 이야기를 제대로 음미하고자 나는 다시 한 번 책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