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바버라 J. 킹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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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워쇼가 2007년에 42세로 사망하자, 미국 인류학회로부터 월간 소식지에 실을 워쇼의 부고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오배리가 동물 행동주의 활동에 나서고, 일본의 돌고래 도살 관습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마음먹게 된 데는 돌고래들과 함께한 이력이 크게 작용했다.

우리가 동물의 감정을 인식하고 다른 동물들과의 동류의식을 자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두 마리의 곰, 그리고 수천 마리가 넘는 곰들에 대한 슬픔이 북받치는 상황에서 이렇게 분석적인 질문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의식적인 호흡’을 해야 하는 돌고래들은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한다. 돌고래들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할 정도로 예민한 감정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영향은 잠깐에 그치기도 하고 장기간 계속되기도 한

어린 침팬지 플린트는 어미 침팬지의 죽음으로 슬퍼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신체를 훼손함에 따라 생겨나는 고통이 더 깊은 감정적 고통을 일시적으로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자해 또한 인간에게 국한된 행동이 아니다.

조사한 병리학자 빅 심프슨Vic Simpson의 말을 인용했다. "일종의 집단 자살처럼 보인다. 돌고래들이 해변에 좌초되는 사례는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다. 돌고래 대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좌초된 사례들도 있다

‘사육장 직원이 새끼 곰의 담즙을 채취할 준비를 하자 새끼 곰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사랑하는 새끼 곰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움을 느낀 어미 곰은 우리를 탈출했고, 새끼 곰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새끼 곰의 목숨을 빼앗았다. 감정적 고통을 주체할 수 없었던 어미 곰은 의도적으로 벽에 돌진해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곰 사육농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담즙 농장에서 일어나는 일. 중국, 베트남, 한국 등 아시아 곳곳에 곰들이 감금돼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 담즙에 의학적 효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관찰만으로는 어미 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그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만 남겨두지는 말자. 대신 두 곰이 겪어야 했던 운명과 어미 곰이 실제로 한 행동(어미 곰에게 의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의도였는지를 떠나서)에 미루어, 동물의 슬픔에 관해 우리가 이미 던진 질문들에 새로운 질문을 더해보자. 동물들은 자살을 하나? 자살을 한다면, 슬픔이 동기일 수 있나?

"가족이 있는 사람은 진짜로 죽는 게 아니거든." 죽으면 부고가 나는 사람이든 부고가 나지 않는 동물이든 이 말은 누구에게나 어울린다

구글 검색창에 ‘동물의 자살’을 입력하면 이와 같은 무모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동물 자살의 주요 특징으로 꼽는 각종 일화가 나온다

워쇼는 미국 수화를 익히고 조합해서 뜻을 전달하는 데 획기적인 성취를 이룬 침팬지였고, 미국 인류학회는 이에 근거해 워쇼가 학회원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데일리 메일》은 관련 온라인 기사에 ‘궁극적 희생, 고문으로 점철된 삶에서 벗어나려 새끼 곰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어미 곰’이라는 헤드라인을 박았다.

《헤아려 본 슬픔》 마지막 부분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도 한다. "격정적 슬픔은 우리를 죽은 이와 연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단절시킨다.

내가 다른 동물들은 경험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바로 슬픔의 무게에 대한 의식과 슬픔에 관한 정신적 성찰의 지형도 변화다

한 인구 통계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약 5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1070억 명가량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내게 두드러지게 다가온 것은 인간의 특별함이 아니라 비인간 동물들도 사랑을 하고 슬픔을 느낀다는 깨달음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야생에서, 농장이나 생추어리, 동물원에서, 또는 우리와 함께 가정집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이 인간의 무시와 학대로 풍파를 겪었거나 직면해 있는 실상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봄날을 즐기기를 포기하고 온 사람들, 내 아버지에게 직접 애도를 표하고 나와 내 어머니에게 힘을 주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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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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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삶이란 비자아와의 동화가 너무도 충만한 나머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를 자아마저 소멸해버리는 종말일 것이다.
?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

나는 찾는다, 나는 찾는다, 나는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자신의 상실이란, 발견한 것으로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형체는 혼돈의 모양을 만들고, 하나의 형체는 무정형 물질에 양식을 부여한다.

일찍부터 나는 내 빈약한 지성의 한계를 불평 없이 인정하도록 강요당했고, 매번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삶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고지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삶이라는 유일한 수준만을 살기 때문에. 단지 나는 지금,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비밀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가장 먼저 느끼는 소심한 쾌감은, 추한 것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확신이다. 이런 상실은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멋진지.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깊은 도덕심, 내 도덕심은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사물들을 가지런히 배치했다

완전하게 살아 있는 세계란 지옥의 힘을 가졌으므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몇 년 전 내 기억의 저장고 속으로 파고들었던 오래된 문장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항상 뭔가가 거의 절정에 이른 다음, 그제야 나는 계속해서 누적된 일의 결과가 터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 순간에 난데없이 일어난 폭발이나 붕괴를 본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던 것이다.

나는 뭔가가 시작되려는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적이 아직 단 한 번도 없다

삶을 모방하기, 그것은 과거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삶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삶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진정한 저작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세계를 인용한다. 세계가 나 자신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므로, 나는 세계를 인용한다.

"내가 아닌 것처럼"이 "나인 것처럼"보다 더욱 포괄적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삶은 나를 완전히 장악했고 나를 발명품처럼 분주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의 복사품이었고, 그 아님의 이미지는 나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나는 반대의 것을 향한 그리움을 앓았다. 그것은 ‘불행’이었다.

그렇게 내 ‘불행’을 살아냄으로써, 나는 감히 소망하거나 시도하지조차 못했던 삶의 반대편을 살았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단 한 가지, 그 실패는 과연 내게 필요했던가.

기쁨의 분량이 거의 없는 평온함은 내게 균형을 되찾아줄 것이다

조각에 몰두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기쁨이 거의 없는 평온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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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바버라 J. 킹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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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신실한 사랑의 표본이다. 오디세우스가 무려 20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데도 결코 다른 이를 만나지 않았다.

황새, 백조, 기러기 같은 새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부일처와 연결돼 있다면, 까마귀류의 상징적 울림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까마귀와 큰까마귀는 미스터리와 모순의 새다.

그들은 계략을, 속임수를, 죽음을, 파멸을 상징한다. 하지만 동시에 창조력을, 치유를, 예언을, 죽음에 내재한 변형의 힘을 상징한다.

큰까마귀가 자신보다 작은 동물을 혹독하게 공격한 사례들도 기록돼 있다. 북극에서 있었던 일로, 큰까마귀 한 쌍이 협력해 얼음판 위에서 쉬고 있는 새끼 물개들을 죽였다.

영장류학자로서 나는 까마귀들이 침팬지와 인지적, 행동적 유사성을 지녔다는 데 기인해 ‘깃털 달린 유인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주 흡족하다.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단순히 공포나 흥분의 표현이 아니라 포식자, 가족들, 가용한 자원에 관한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원숭이 어미와 유인원 어미가 그렇듯, 돌고래 어미들도 죽은 새끼의 시신을 끼고 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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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안녕의 의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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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된 로봇을 분해·일시 보관하는 창고와 그것들을 해체·처분하는 공장으로, 튼튼하고 기능적이며 살풍경하다.

사람들이 수다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수다를 더 빠르게 주고받는 목적만으로 귀중한 자원과 인재를 소모하기는 아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봇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나친 의인화로 인해 애정 과잉에 빠지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도 이 흐름의 부작용이랄 수 있다.

그 애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 목소리에 목소리로 답하지 못해도 좋다. 그 애와 수화로 대화하는 오래된 로봇이, 나는 되고 싶었다

그보다 나는 로봇이 되고 싶다.
그런 귀여운 여자애와 손을 잡고 걷기보다, 그 애가 두 팔 가득 안은 세탁물을 개키는 걸 도와주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이 되고 싶다

그 애가 어렸을 때, 아장아장 걷는 그 애를 뒤에 거느리고 청소를 하거나 짐을 옮기고 싶었다.

이 세계에는 인간보다 로봇이 어울린다. 아니라면 다들 저렇게, 저 여자애처럼, 로봇을 위해 울고 로봇을 걱정하며 로봇과 마음을 나누려 할 리 없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로봇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답답해서, 원통해서…….
나는 때때로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로봇은 결코 하지 않는 행위이지만.

천장이 높다란 계단에 ‘여걸’이라는 말이 유독 낭랑하게 울린다. 그 안에 담긴 야유 섞인 빈정거림이 잔향 속을 떠다녔다

"‘검은 메시아’랍니다.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괴물입니다. 그것이 여기저기서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나, 아이를 제물로 삼는 범죄자를 퇴치한다는 겁니다."
그 괴물을, 시바노 가즈미는 봤단다.

성서를 몰라도 ‘묵시록’이라면 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몰라도 ‘제7의 봉인’이나 ‘청황색 말을 탄 기사’나 ‘붉은 용’이라면 안다.

‘아마겟돈’이라면 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상상력을 건드리는 재료만 알고 있으면 된다. 철퇴의 유다가 하는 말은 자체의 설득력보다 배후에 숨겨져 살짝살짝 보였다 말았다

데라시마 씨와 시바노 가즈미의 부자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수복중이랄까, 구축중이다. 서로 완전히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라, 한발 더 파고들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원인은 적어도 데라시마 씨 쪽에서는 확실하다.

대체 뭘 봤는지, 나는 알고 싶다. 그래서 시간을 벌면서 기다렸다. 가장 그럴듯하게 시바노 가즈미를 만나기 위해.

정의 따위는 그곳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무사 안일주의뿐. 끊기 힘든 혈육의 굴레나 부모자식의 정을 맹신하는 성선설뿐이었다.

사악함이 지상을 활보했다. 정의의 가치는 먼지보다 가벼웠다.

달려서 도망쳤다. 따뜻한 햇살 아래를, 평화로운 휴일의 동네를 달려, 나의 메시아가 내게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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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에세 2 에세 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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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답했던 사람이 바로 저 잔인성의 표본인 네로였다면 누가 믿을까?

때문이다. 소(小) 마리우스는 어떤 때는 마르스의 아들이다가 어떤 때는 비너스의 아들이 된다.

재고할 수 없는 결심은 나쁜 결심이다.
푸블리우스 시루스

그는 말한다. "‘의지가 올바르기만 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 생각조차 없다. 왜냐하면 의지가 올바르지 않으면, 늘 동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사실 나는 일찍이 악이란 일탈이요 절도의 결여일 따름이며, 따라서 악에 확고부동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걸 터득했다

원했다가는 팽개치고, 금방 버린 것을 다시 원하고,
항상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그의 인생은 영원한 모순이다.
호라티우스

우리는 원하는 그 순간밖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끄나풀에 꺼들린 나무 꼭두각시처럼 우리는 휘둘린다.
호라티우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휩쓸려 간다. 부유물처럼, 물이 거세냐 잔잔하냐에 따라 때로는 순하게, 때로는 격하게.

우리는 여러 의견들 사이를 떠다닌다. 그 무엇도 자발적으로,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그 무엇도 한결같이 원하지 않는다.

확실한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정해 머릿속에 세워 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행동의 일관성, 모든 일들 사이의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선한 것을 선이라 하고, 좋은 일일 수 있는 일은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 인간의 조건10)은 야릇해서, 우리는 종종 악의 충동에 떠밀려 선행일 수 있는 일을 행하게 된다.

모욕에는 무기력하게 처신하면서 가난은 굳세게 견딘다면, 외과 의사의 수술칼 앞에서는 겁을 먹어도 적수의 칼 앞에서는 결연하다면 그 행위는 가상해도 사람이 가상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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