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안녕의 의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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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된 로봇을 분해·일시 보관하는 창고와 그것들을 해체·처분하는 공장으로, 튼튼하고 기능적이며 살풍경하다.

사람들이 수다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수다를 더 빠르게 주고받는 목적만으로 귀중한 자원과 인재를 소모하기는 아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봇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나친 의인화로 인해 애정 과잉에 빠지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도 이 흐름의 부작용이랄 수 있다.

그 애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 목소리에 목소리로 답하지 못해도 좋다. 그 애와 수화로 대화하는 오래된 로봇이, 나는 되고 싶었다

그보다 나는 로봇이 되고 싶다.
그런 귀여운 여자애와 손을 잡고 걷기보다, 그 애가 두 팔 가득 안은 세탁물을 개키는 걸 도와주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이 되고 싶다

그 애가 어렸을 때, 아장아장 걷는 그 애를 뒤에 거느리고 청소를 하거나 짐을 옮기고 싶었다.

이 세계에는 인간보다 로봇이 어울린다. 아니라면 다들 저렇게, 저 여자애처럼, 로봇을 위해 울고 로봇을 걱정하며 로봇과 마음을 나누려 할 리 없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로봇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답답해서, 원통해서…….
나는 때때로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로봇은 결코 하지 않는 행위이지만.

천장이 높다란 계단에 ‘여걸’이라는 말이 유독 낭랑하게 울린다. 그 안에 담긴 야유 섞인 빈정거림이 잔향 속을 떠다녔다

"‘검은 메시아’랍니다.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괴물입니다. 그것이 여기저기서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나, 아이를 제물로 삼는 범죄자를 퇴치한다는 겁니다."
그 괴물을, 시바노 가즈미는 봤단다.

성서를 몰라도 ‘묵시록’이라면 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몰라도 ‘제7의 봉인’이나 ‘청황색 말을 탄 기사’나 ‘붉은 용’이라면 안다.

‘아마겟돈’이라면 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상상력을 건드리는 재료만 알고 있으면 된다. 철퇴의 유다가 하는 말은 자체의 설득력보다 배후에 숨겨져 살짝살짝 보였다 말았다

데라시마 씨와 시바노 가즈미의 부자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수복중이랄까, 구축중이다. 서로 완전히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라, 한발 더 파고들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원인은 적어도 데라시마 씨 쪽에서는 확실하다.

대체 뭘 봤는지, 나는 알고 싶다. 그래서 시간을 벌면서 기다렸다. 가장 그럴듯하게 시바노 가즈미를 만나기 위해.

정의 따위는 그곳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무사 안일주의뿐. 끊기 힘든 혈육의 굴레나 부모자식의 정을 맹신하는 성선설뿐이었다.

사악함이 지상을 활보했다. 정의의 가치는 먼지보다 가벼웠다.

달려서 도망쳤다. 따뜻한 햇살 아래를, 평화로운 휴일의 동네를 달려, 나의 메시아가 내게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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