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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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삶이란 비자아와의 동화가 너무도 충만한 나머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를 자아마저 소멸해버리는 종말일 것이다.
?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

나는 찾는다, 나는 찾는다, 나는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자신의 상실이란, 발견한 것으로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형체는 혼돈의 모양을 만들고, 하나의 형체는 무정형 물질에 양식을 부여한다.

일찍부터 나는 내 빈약한 지성의 한계를 불평 없이 인정하도록 강요당했고, 매번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삶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고지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삶이라는 유일한 수준만을 살기 때문에. 단지 나는 지금,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비밀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가장 먼저 느끼는 소심한 쾌감은, 추한 것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확신이다. 이런 상실은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멋진지.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깊은 도덕심, 내 도덕심은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사물들을 가지런히 배치했다

완전하게 살아 있는 세계란 지옥의 힘을 가졌으므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몇 년 전 내 기억의 저장고 속으로 파고들었던 오래된 문장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항상 뭔가가 거의 절정에 이른 다음, 그제야 나는 계속해서 누적된 일의 결과가 터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 순간에 난데없이 일어난 폭발이나 붕괴를 본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던 것이다.

나는 뭔가가 시작되려는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적이 아직 단 한 번도 없다

삶을 모방하기, 그것은 과거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삶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삶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진정한 저작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세계를 인용한다. 세계가 나 자신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므로, 나는 세계를 인용한다.

"내가 아닌 것처럼"이 "나인 것처럼"보다 더욱 포괄적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삶은 나를 완전히 장악했고 나를 발명품처럼 분주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의 복사품이었고, 그 아님의 이미지는 나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나는 반대의 것을 향한 그리움을 앓았다. 그것은 ‘불행’이었다.

그렇게 내 ‘불행’을 살아냄으로써, 나는 감히 소망하거나 시도하지조차 못했던 삶의 반대편을 살았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단 한 가지, 그 실패는 과연 내게 필요했던가.

기쁨의 분량이 거의 없는 평온함은 내게 균형을 되찾아줄 것이다

조각에 몰두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기쁨이 거의 없는 평온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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