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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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이 반드시 만능은 아니란 걸 알고도 낙담하긴 커녕 애착이 점점 깊어 갔다. 가려운 곳에 손이 채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부분마저도 애쓰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절대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핏 보아서는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어릴적부터 말에 대해 흥미가 있었던 아라키는 삼촌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사전에 빠져들었다. 실린 말을 계속해서 찾아나가며 사전을 독파하던 아라키는 결국 국어학을 전공하여 사전을 만드는 일에 열정과 시간 전부를 쏟아붓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사전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지 37년째입니다."

 "오, 벌써 그렇게 됐군요."

 "됐네요. 선생님을 만난 지 벌써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때는 선생님도 머리숱이 많았는데."

 아라키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마쓰모토 선생의 정수리를 보았다. 마쓰모토 선생은 용례채집카드를 쓰고 있던 연필을 멈추고 학처럼 가느다란 몸을 흔들며 웃었다.

 "아라키 씨도 제법 머리에 서리가 내렸는걸요?"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라키가 아니다. 아라키는 정년퇴직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마쓰모토 선생과 만들던 꿈이 담긴 사전. <<대도해>>를 편찬하기 위하여 후임을 물색한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회사원으로는 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덥수룩한 머리,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하지만 아라키가 마지메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에게 주목한 것은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책상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그 모습이었다.


 "<<대도해>>란 우리 편집부에서 만들려고 하는 새 사전의 이름이야.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쓰지. 자네한테 그 일을 맡기고 싶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이제 여러분은 이 소설의 제목이 어째서 '배를 엮다(舟を編む)'인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 작가의 배를 엮다(舟を編む)는 사전편집부 사람들이 꿈의 사전인 <<대도해>>를 만들기 위해 15년 동안의 열정과 정성을 쏟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겨우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더니, 놀랍게도 이 책은 재미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책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감동은 뜨겁기까지 하다.


 포만감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아도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한, 가구야 씨는 계속 솜씨를 발휘할 것이다. 아무도 완벽한 사전을 만들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로 생각을 전하려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일을 완성시킬 것이다.


 작가가 '사전'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말하고 싶은 주제는 성실함, 책임감, 소명의식, 그리고 열정과 같은 교훈일 것이다. 주인공인 마지메는 특별히 눈에 띠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전'에 몰두하여 인생을 모두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소명의식, 그리고 성실함이 존재한다. 그 열정은 가구야라는 운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꺼지지 않는다. 이런 교훈 외에도 마지메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재미나, 가구야와의 서툰 연애 역시 굉장히 재미있다.


 니시오카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어떤 것에도 그리 빠져들지 못하고, 일은 무난히 하고 있지만 바람직한 평가는 얻지 못하고, 늘 타인과 능력을 비교하며 초조해했다. 그런 비굴한 자신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는지, 수수께끼라고밖에 할 수 없다. 보기 괴로울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내게도 마지메의 사전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니시오카는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분명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세계가 눈에 비치겠지. 가슴 터질 것 같은 빛을 띤 세계가.


 사전편집부에는 니시오카라는 다소 가벼운 인물이 등장한다. 평소 가벼운 언동과 자신감있는 태도를 가진 그는 오히려 외적인 부분이 부족해보이는 마지메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메를 이기기 위하여 카구야를 유혹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연약함을 느끼며 열정과 꿈이 없는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다. 니시오카는 꿈도 없고, 열정도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며, 역설적으로 열정과 꿈의 소중함에 대해 그려나간다.


 아픔을 느낄 정도의 속도로 열 덩어리가 니시오카의 목을 치고 올라왔다.

 헤어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질질 끌어 온 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나를 초조하게 할 때가 있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버리고 싶지 않다. 레미를 좋아한다. 못생겼지만 귀엽다.


 금방 사라져버릴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 담긴 주제를 말하는 부분은 물론, 연애 소설로서의 재미도 충분히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사전편집부의 조력자가 되어준 니시오카는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그가 보여준 동료애와, 마지메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사전에 대한 열정은 감동적이다. 자신의 열등감을 고백하고 성장하였기에 더더욱.


 '사전'을 통한 이 소설의 열정은 단순히 사전의 내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후반에는 제지 회사 사람인 미야모토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마지메의 의뢰를 받아서 '대도해'에 사용될 특수 용지를 제작한다. 종이가 너무 두껍고, 무거우면 안되며, 글이 다음 장에 비쳐서도 안되고,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 한번에 여러 장에 붙어 넘겨지면 안된다. 종이에서는 따스함이 있는 색조가 비쳐야되고, 심지어는 미끈거리는 손맛까지 있어야한다. 마지메의 합격, 불합격의 말에 따라 울고 웃는 이 제지 회사 사람들 역시 독특한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직업과 소명에 최선을 다하고 인생을 쏟아붓는, 그런 멋진 사람이다.


 사전은 이렇듯이 종이 뿐만 아니라, 단어에 알맞은 뜻풀이와 적절한 예문, 심지어는 할당된 페이지에 맞춰서 많은 표제어를 집어 넣을 수 있도록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어야하며, 단어 하나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편집부 전체가 한달동안 숙박을 해야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한 권의 사전이 탄생한다. 하지만 '배를 엮다'에서 묘사되는 사전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책이다. 사회의 움직임에 따라 매일마다 사어와 신조어가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이 완성되는 순간, 다시 개정판을 준비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이 배를 엮다(舟を編む)는 그런 진실한 의미에서 완성할 수 없는 사전. '대도해'를 만들기 위하여 15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쏟는 마지메와 사전편집부 사람들의 열정을 그린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소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와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그려내는 소설이다. 그 뜨거운 열정과 정성에 감동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부디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게. 아라키는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이 오래 안심하고 탈 수 있는 배를. 외로움에 사무칠 것 같은 여행의 날들에도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배를.

 자네라면, 분명히 할 수 있어.


 2012년 일본 서점대상 1위를 수상한 작품이라 이전부터 보고싶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책이다. '사전'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교훈과 감동을 남기면서도 장면을 그려내는 깨알같은 재미에 웃기도 하였고, 등장인물들의 사랑 이야기 역시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언어'에 대해 그려내는 그 필력에는 감탄했다. 아라키가 처음 마지메를 만나러 갔을 때. '다른 데서 온 사람'이라는 뉘앙스에 대해 사전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이나, 가구야의 요리점에서 '시메'에 대한 언어유희를 하는 부분 등의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언어'에 대한 사랑. '언어'를 소재로 하여 '언어'로 이루어지는 책에 담긴 의도가 감탄스럽다.


 종이 사전을 손에 쥐어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전자사전이 보급된 이후 종이 사전을 만져본 일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따라 종이 사전이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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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시오리코 씨와 미스터리한 일상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2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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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재로 한 힐링 미스터리로 눈길을 끌었던 미카미 엔(三上延) 작가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ビブリア古書堂の事件手帖) 2권이 발매되었다. 시리즈 누계 500만부 가까이 팔리며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는 책이라는 타이틀과 다르게 미숙한 미스터리,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진행과 뻔한 일상, 힐링물의 분위기를 풍기는 전권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 했음에도 2권을 구매했다. 1권만 가지고는 재미를 판단하기 애매했던 탓도 있지만, 그만큼 책을 좋아하는 애독자의 입장으로서 책을 소재로 다루는 고서점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 사카구치 미치요 『크라크라 일기』(분게이순슈) 1 

제1장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하야카와NV문고) 

제2장 후쿠다 데이치 『명언수필 샐러리맨』(로쿠가쓰샤) 

제3장 아시즈카 후지오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쓰루쇼보) 

에필로그 - 사카구치 미치요 『크라크라 일기』(분게이순슈) 2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와 같은 책들이 등장한다. 단순히 소설뿐 아니라 수필, 만화 등 다양한 책을 다루는 것이 인상깊다. 각 에피소드의 시작 부분에 소설 내용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일러스트가 여전히 멋지다. 스릴 있거나, 반전이 곁들여진 미스터리가 아니라 고서점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을 그려내는 일상 미스터리임에도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에 감탄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말 그대로 '힐링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잘 어울리는 책이다. 외관도 멋지지만 책의 내용은 더욱 멋진 향기를 풍긴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명세만큼의 재미가 있었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소재와 비쥬얼적인 측면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만큼 더욱)아쉽다. 몰입도는 있고, 쉽고 빠르게 읽히며, 읽다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지만, 인상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전개는 없다. 이번 권 역시 1권과 마찬가지로 각 책들에 관련된 사건을 단편 형식으로 풀어나가지만 그 단편들은 '미스터리'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1권보다도 못하다. 그나마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처음부터 정답을 알고있었다는 해답 풀이에는 벙쪄버렸다. 크라크라 일기에 담긴 시오리코의 사정을 유추해내는 다이스케의 모습. 누구나 추측할 수 있을 법한 추리(아니,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 '누구나 유추해 낼 수 있다'라는 느낌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를 엄청 중요한 듯이 그려내는 것도 그렇고... 어지간히 미스터리에는 맞지 않는 작가라는 느낌까지 든다.


 오히려 이번 2권에서는 주인공인 고우라 다이스케와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관계와 각각의 사정이 중심 소재가 되었다. 『명언수필 샐러리맨』에서 다이스케의 옛 여자친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그의 마음속에 담겨있던 갈등을 해소하는 부분도 재미있었고, 이야기를 거쳐가며 한층 더 진전되는 다이스케외 시오리코의 관계가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도 『크라크라 일기』1에서 『UTOPIA 최후의 세계대전』, 『크라크라 일기』2로 이어지는 시오리코의 어머니에 대한 떡밥은 다음 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고, 어째서 10년 전에 두 딸을 남겨두고 사라졌을까?


 다음 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다음 권을 구매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생긴다. 나쁘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다음 권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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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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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야쿠마루 가쿠(藥丸嶽) 작가의 처녀작인 천사의 나이프(天使のナイフ)는 삼중으로 뒤얽히는 사건과 반전 속에 소년법을 비판하며 '소년 범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문제를 심도깊게 다룬 사회파 소설이다.


 "그 소년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겁니까?"

 히야마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어떤 벌도 받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이 나라는 한정적으로라도 살인을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천사의 나이프는 소년 세 명에게 아내가 살해당한 남자. 히야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는 아내를 잃고 가정이 붕괴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의 신상 정보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그들이 개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14세 이하인 자의 행위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법의 모순점에 분노한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딸아이를 위하여 순응하고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택하지만, 어느 날 평소처럼 일하고 있는 히야마에게 경찰이 찾아와 4년 전 그 사건의 범인인 소년들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사건에 이상함을 느낀 히야마는 사건을 파고들어가며 충격적인 사실과 상상 이상으로 얽혀있는 사건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피해자측은 생각하지 않고 소년들만을 감싸고 도는 매스컴을 증오하고, 알 권리마저 빼앗아버리는 사회에 분노하는 히야마의 모습을 통하여 법의 모순점을 한껏 비판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범죄자들을 엄하게 처벌하자는 '엄벌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소년들을 보호하고 개선시키자는 '보호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매스컴 관계자인 '누쿠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엄벌파도, 보호파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양쪽에서 욕을 먹는 누쿠이가 오히려 주인공인 히야마보다 작가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했다고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히야마는 자연스럽게 '엄벌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누쿠이를 증오하는 입장이 된다.


 하지만 히야마는 사건이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진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그 역시 엄벌파와 보호파의 중간에 자리잡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간 작은 범죄자들을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범죄자들이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어째서 장모는 자신의 딸을 살해한 소년들을 생각하며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었나. 천사의 나이프(天使のナイフ)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 모든 이들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는 훌륭한 사회파 소설이다.


 그런데 어째서 평점이 이런가? 하고 물으면 읽는 재미면에서 아쉬웠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미스터리라는 형식 속에 훌륭하게 사회성을 담아냈지만, 긴박함이 필요한 이야기임에도 이야기 진행에 스릴이 부족하여 마지막의 반전을 살려내지 못해 아쉽다. 본격 1세대 미스터리 작가인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는 "'현실'을 다룬 사회파 소설이면서 정통 미스터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 기쁘다."라고 말했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미스터리적인 완성도가 전혀 높지 않았다. 삼중으로 얽혀있는 사건은 과연 놀라웠지만, 그 삼중으로 얽힌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는 부분이 대단히 밋밋했고, 또한 반전을 깨달을 수 있는 복선과 단서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부분에서 미숙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공통점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름이 높은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다카노 카즈아키(高野和明) 작가의 13계단(13階段)과 비교하게 된다. 13계단 역시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을 스릴있는 미스터리에 담아낸 훌륭한 작품인데, 법률에 대한 해석과 스릴있는 이야기전개, 그리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감정이라는 부분에서 이 천사의 나이프는 13계단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느낀 점은 많았지만, 재미만 보자면 그저 읽을만한 정도였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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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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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광 게임(月光ゲ-ム)은 유명 본격 추리 작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有栖川有栖)의 실질적인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름 합숙을 위해 야부키 산에서 캠핑을 하게 된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회원들. 그곳에서 만난 다른 그룹의 학생들. 하지만 야부키 산의 화산 활동으로 인하여 산중에 고립되어 버리고 그곳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현장에 남겨진 다잉메시지 Y. 작가는 독자에게 결말이 드러나기 전 도전장을 내민다.


 1989년에 출판된 본격 미스터리 작품임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엔터테인먼트하다. 그래서인지 가볍게 읽을만 했고, 데뷔작으로는 나쁘지 않았다는 느낌이지만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 치고는 허술하고 미숙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다잉메시지 Y의 의미가 나중에 밝혀지고 나서는 어이가 없었다. 다잉메시지는 등장인물 중 한명인 누구의 말처럼 해석하는 사람 마음이라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달의 요기'같은 소재나, '루나'라는 등장인물 등은 약간의 유치함을 안겨준다.


 마찬가지로 본격 작가로서 명성이 드높은 아야츠지 유키토 작가가 십각관의 살인에서 본격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사상, 혹은 주장을 피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 역시 이 작품에서 본격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한껏 내세운다. 본격 미스터리 작품 속에 본격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는 정도가 되야 진정한 본격 미스터리 작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크게 인상깊은 작품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고, 평작 정도의 재미는 뽑아낸다. 유명 추리 작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읽어주시길. 십각관의 살인과 비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아야츠지 유키토 작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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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 리셋 7 - BOY, GIRL and the STORY of SAGRADA, NT Novel
코노 유타카 지음, 이형진 옮김, 시이나 유우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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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건 정말 대단하다. 마지막 권을 덮고 느껴지는 깊은 여운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요 몇일 동안 사쿠라다 리셋(サクラダリセット)이라는 시리즈에 흠뻑 빠져있었다. 라이트노벨에 이런 명작이 있었을 줄이야. 라이트노벨계에 길이 남을 작품.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작품이다. 탄탄한 플룻으로 적당한 길이로 마무리 된 것이 감탄스럽기도 하면서 조금 더 길었어도 괜찮았을텐데...하는 아쉬움도 든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소년과 소녀와 올바른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능력'을 다루는 장르적인 재미와 라이트노벨의 가벼운 형식 속에 무거우면서도 깊은 시사점을 남겨 책을 읽는 내내 고심하게 만든다.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올바른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옳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을 수없이 제시한다. 주인공인 케이는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만,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작가 역시 독자들이 확실하게 '이게 옳다!'라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사라진 사쿠라다의 행복을 최종화에서 그려낸 것이다.


 리셋된 사쿠라다의 행복과, 완벽하지 않은 마무리를 보고 나서는 더욱 케이의 선택에 대해 '옳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고양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노노오라는 등장인물이 있음에도 고양이에게 희생을 전가하는 식의 마무리의 모순점에는 아쉬움까지도 느꼈다. 하지만 케이의 선택을 항상 칭찬할 수는 없어도, 수긍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그 아름다운 생각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가 이 작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고 이 작품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이능물로서의 장르적인 재미와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충분히 녹아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라이트노벨처럼 '그냥 좋아해!'하는 가벼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멀리 돌아가는 순수하면서도 복잡한 사랑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내면묘사를 보고있자면 감탄까지 나온다. 


 입만 살짝 움직여서 아사이 케이는 웃었다.

 "저는 이 거리에 능력을 남기려고 합니다. 이 예쁜 기도 같은 힘을 버리는 것은 아까워요."

 우라치 마사무네도 웃었다. 얼굴 전체에 옅은 웃음을 그려 붙인 것처럼.

 "나는 능력이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해. 희망인 척 보이지만 비극만 낳는 이 힘은 악마 같은 것이다."


 최종화에서는 사쿠라다의 능력을 지켜내려는 아사이 케이와 사쿠라다를 '리셋'시키려는 우라치 마사무네. 닮았으면서도 정 반대의 사상을 가진 두 사람이 대립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전의 어느 에피소드보다도 스릴있고, 천재들의 싸움을 보는 것처럼 서로의 심리와 미래를 읽으며 대립해나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정말로 재미있다.


 이번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나는 항상 어딘가 달관한 듯한 가치관과 두뇌를 보여주었던 케이가 이전과 다르게 깊게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고집과 감정을 인정하고 수긍하며 목적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마치 열혈물처럼.....


 ㅡ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빛나지 않는 눈물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눈물이다.

 눈물은 턱 근처에서 방울이 되어 허공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바닥에 닿을 때 희미한 소리를 내겠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가, 그러나 틀림없이 나겠지. 아주 희미한 자기 주장으로서.

 하지만 실제로는 눈물이 바닥에 닿는 일은 없었다.

 리셋.

 그 능력은 세계를 3일치 죽인다.

 기쁨도, 슬픔도, 웃는 얼굴도, 눈물도 전부 한꺼번에 지워버린다.


 사쿠라다 리셋은 '이능력'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흔한 배틀물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그 점만으로도 칭찬할만한데, 완성도는 더욱 높다. 투명한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감각적인 묘사, 코노 유타카 작가 특유의 회유어같이 돌려말하는 방식으로 담아내는 철학, 아름다운 등장인물들과, 외향보다 더욱 아름다운 마음이 그려지는 소설이다. 단순히 라이트노벨 독자뿐만 아니라 일반 소설 독자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싶다.


 코노 유타카 작가의 다음 작품만을 기다리고 있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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