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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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이 반드시 만능은 아니란 걸 알고도 낙담하긴 커녕 애착이 점점 깊어 갔다. 가려운 곳에 손이 채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부분마저도 애쓰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절대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핏 보아서는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어릴적부터 말에 대해 흥미가 있었던 아라키는 삼촌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사전에 빠져들었다. 실린 말을 계속해서 찾아나가며 사전을 독파하던 아라키는 결국 국어학을 전공하여 사전을 만드는 일에 열정과 시간 전부를 쏟아붓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사전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지 37년째입니다."

 "오, 벌써 그렇게 됐군요."

 "됐네요. 선생님을 만난 지 벌써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때는 선생님도 머리숱이 많았는데."

 아라키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마쓰모토 선생의 정수리를 보았다. 마쓰모토 선생은 용례채집카드를 쓰고 있던 연필을 멈추고 학처럼 가느다란 몸을 흔들며 웃었다.

 "아라키 씨도 제법 머리에 서리가 내렸는걸요?"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라키가 아니다. 아라키는 정년퇴직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마쓰모토 선생과 만들던 꿈이 담긴 사전. <<대도해>>를 편찬하기 위하여 후임을 물색한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회사원으로는 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덥수룩한 머리,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하지만 아라키가 마지메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에게 주목한 것은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책상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그 모습이었다.


 "<<대도해>>란 우리 편집부에서 만들려고 하는 새 사전의 이름이야.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쓰지. 자네한테 그 일을 맡기고 싶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이제 여러분은 이 소설의 제목이 어째서 '배를 엮다(舟を編む)'인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 작가의 배를 엮다(舟を編む)는 사전편집부 사람들이 꿈의 사전인 <<대도해>>를 만들기 위해 15년 동안의 열정과 정성을 쏟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겨우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더니, 놀랍게도 이 책은 재미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책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감동은 뜨겁기까지 하다.


 포만감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아도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한, 가구야 씨는 계속 솜씨를 발휘할 것이다. 아무도 완벽한 사전을 만들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로 생각을 전하려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일을 완성시킬 것이다.


 작가가 '사전'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말하고 싶은 주제는 성실함, 책임감, 소명의식, 그리고 열정과 같은 교훈일 것이다. 주인공인 마지메는 특별히 눈에 띠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전'에 몰두하여 인생을 모두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소명의식, 그리고 성실함이 존재한다. 그 열정은 가구야라는 운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꺼지지 않는다. 이런 교훈 외에도 마지메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재미나, 가구야와의 서툰 연애 역시 굉장히 재미있다.


 니시오카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어떤 것에도 그리 빠져들지 못하고, 일은 무난히 하고 있지만 바람직한 평가는 얻지 못하고, 늘 타인과 능력을 비교하며 초조해했다. 그런 비굴한 자신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는지, 수수께끼라고밖에 할 수 없다. 보기 괴로울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내게도 마지메의 사전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니시오카는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분명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세계가 눈에 비치겠지. 가슴 터질 것 같은 빛을 띤 세계가.


 사전편집부에는 니시오카라는 다소 가벼운 인물이 등장한다. 평소 가벼운 언동과 자신감있는 태도를 가진 그는 오히려 외적인 부분이 부족해보이는 마지메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메를 이기기 위하여 카구야를 유혹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연약함을 느끼며 열정과 꿈이 없는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다. 니시오카는 꿈도 없고, 열정도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며, 역설적으로 열정과 꿈의 소중함에 대해 그려나간다.


 아픔을 느낄 정도의 속도로 열 덩어리가 니시오카의 목을 치고 올라왔다.

 헤어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질질 끌어 온 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나를 초조하게 할 때가 있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버리고 싶지 않다. 레미를 좋아한다. 못생겼지만 귀엽다.


 금방 사라져버릴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 담긴 주제를 말하는 부분은 물론, 연애 소설로서의 재미도 충분히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사전편집부의 조력자가 되어준 니시오카는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그가 보여준 동료애와, 마지메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사전에 대한 열정은 감동적이다. 자신의 열등감을 고백하고 성장하였기에 더더욱.


 '사전'을 통한 이 소설의 열정은 단순히 사전의 내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후반에는 제지 회사 사람인 미야모토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마지메의 의뢰를 받아서 '대도해'에 사용될 특수 용지를 제작한다. 종이가 너무 두껍고, 무거우면 안되며, 글이 다음 장에 비쳐서도 안되고,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 한번에 여러 장에 붙어 넘겨지면 안된다. 종이에서는 따스함이 있는 색조가 비쳐야되고, 심지어는 미끈거리는 손맛까지 있어야한다. 마지메의 합격, 불합격의 말에 따라 울고 웃는 이 제지 회사 사람들 역시 독특한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직업과 소명에 최선을 다하고 인생을 쏟아붓는, 그런 멋진 사람이다.


 사전은 이렇듯이 종이 뿐만 아니라, 단어에 알맞은 뜻풀이와 적절한 예문, 심지어는 할당된 페이지에 맞춰서 많은 표제어를 집어 넣을 수 있도록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어야하며, 단어 하나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편집부 전체가 한달동안 숙박을 해야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한 권의 사전이 탄생한다. 하지만 '배를 엮다'에서 묘사되는 사전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책이다. 사회의 움직임에 따라 매일마다 사어와 신조어가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이 완성되는 순간, 다시 개정판을 준비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이 배를 엮다(舟を編む)는 그런 진실한 의미에서 완성할 수 없는 사전. '대도해'를 만들기 위하여 15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쏟는 마지메와 사전편집부 사람들의 열정을 그린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소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와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그려내는 소설이다. 그 뜨거운 열정과 정성에 감동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부디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게. 아라키는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이 오래 안심하고 탈 수 있는 배를. 외로움에 사무칠 것 같은 여행의 날들에도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배를.

 자네라면, 분명히 할 수 있어.


 2012년 일본 서점대상 1위를 수상한 작품이라 이전부터 보고싶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책이다. '사전'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교훈과 감동을 남기면서도 장면을 그려내는 깨알같은 재미에 웃기도 하였고, 등장인물들의 사랑 이야기 역시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언어'에 대해 그려내는 그 필력에는 감탄했다. 아라키가 처음 마지메를 만나러 갔을 때. '다른 데서 온 사람'이라는 뉘앙스에 대해 사전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이나, 가구야의 요리점에서 '시메'에 대한 언어유희를 하는 부분 등의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언어'에 대한 사랑. '언어'를 소재로 하여 '언어'로 이루어지는 책에 담긴 의도가 감탄스럽다.


 종이 사전을 손에 쥐어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전자사전이 보급된 이후 종이 사전을 만져본 일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따라 종이 사전이 끌린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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