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s Search for Meaning (International Edition) (Paperback) -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서
Viktor E. Frankl / Beacon Press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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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지만, 동시에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편집증도 있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두 번째로 읽게 되었고,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며 집중했고,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보석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책이 주는 선물은 읽는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의지심장한 힘을 품고 있는지 다시 실감했다.

‘의미’와 ‘목적’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며 마음속 깊은 곳에 실존적 공허를 안고 살아왔다. 허무감과의 싸움은 늘 치열했고, 나를 붙드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이토록 명료하고 따뜻하게 답해주는 책이 또 있을까. 이번 정독은 마치 내 삶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여정 같았다.

작가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4개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3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할 기회가 있었지만, 집에 있던 테이블 탁자에 새겨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보고는, 부모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는 부모와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부모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자서전적 기록이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겪은 인간 이하의 참혹한 삶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가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부터 의미 중심 치료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원고를 몰래 소지했으나 곧 빼앗겼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에서도 기억을 더듬어 원고를 재작성했고,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적이 그를 버티게 한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수용소 생활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괴적인 환경이었다. 극심한 굶주림, 무감각(apathy), 불면, 냉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감자들은 원시적인 정신 상태로 퇴화해 갔다. 그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프랭클은 이에 단호하게 “Yes”라고 말한다.“Meaning is possible even in spite of suffering.”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고통 때문에 의미는 가능하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삶은 불가피하게 고통을 수반하기에,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Priority: 가능하다면 상황을 창의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
Superiority: 그래도 안 된다면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는 노하우(know-how)를 익히라.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의미’와 ‘목적’이다. 삶의 의미는 고통뿐 아니라 ‘일(work)’과 ‘사랑’ 속에도 숨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음미하며 살아야 전체의 맥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삶의 궁극적 의미는 죽기 직전, 모든 장면을 돌아보는 순간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의미가 내포되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프랭클은 말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삶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우리는 각자 대체 불가능한 소명을 안고 태어났고, 각자의 삶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태도와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수용소에서도 누군가는 돼지(swine)가 되고, 누군가는 성인(saint)이 된다. 누군가는 종교 토론을 하거나 이탈리아 아리아를 부르며 박수를 받고, 누군가는 죽음만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런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동해안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면, 서해안에는 책임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자유란 책임과 동의어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 프랭클에게 삶의 의미란 단지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 그 안에야 비로소 존재의 목적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수감 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도왔고, 수감 후에는 로고테라피를 전 세계에 전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Freud처럼 과거의 상처에서 원인을 찾지도, Adler처럼 인간의 힘만으로 미래를 개척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 역학(existential dynamics)이 실존 공백(existential vacuum)를 채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몸소 실천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다.

책을 덮은 지금, 그는 여전히 내게 묻고 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삶이 나를 향해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은 때때로 큰 부담이 되지만, 동시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자아실현을 통해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자아실현은 자기 초월의 부산물로서만 가능하다(Self-actualization is possible only as a side-effect of self-transcendence)고 했고,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물로서 뒤따라 오는 것이라 했다. (Happiness cannot be pursed; it must ensues.) 결국, 내가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할 때, 나의 존재가치를 세우며 나를 실현시킬 수가 있고 비로소 그 때서야 행복이 나를 따라온다는 것인데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인가?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일까?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by Franz Kafka
Man’s Search for Meaning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산산이 깨뜨린 도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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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Paperback) - 『곰브리치 세계사』원서 A Little History 2
Gombrich, E. H. / Yale Univ Pr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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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History)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자신의 무지나 실수를 인정하며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기에, 나도 핑계 거리를 찾아본다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역사와 세계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기에는 그동안 충분한 시간과 정보가 많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 나는 그동안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원망스럽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역사를 알지 못함으로 다른 책을 읽어도 맥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많으리라. 우연히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지만, 나의 방치되었던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데 촉매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2008년에 발행되었으며, 역사서를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모든 배움을 포함하여 역사 탐구도 즐겁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쓴 책이다. 공부하듯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기에 가볍게 읽었으나, 한 권의 책(284쪽) 안에 구석기 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방대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어 내 기억력의 한계로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책을 좋아해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만, 항상 내가 느끼는 것이 있는데, 독서에 대한 욕심이 지적 집착, 인지적 허영, 권태를 피하는 호기심, 외로움을 채우는 수단 등 그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책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읽기에 가끔은 활자만 읽으며 ‘읽기 위해 읽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이 있다.

오랜 기간 읽었음에도 전체적인 맥을 잡거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파편적으로 듣고 배운 기억을 상기시키며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Veni, Vidi, Vici (I came, I saw, I conquered)를 부르짖으며 승리의 쾌거를 외쳤던 로마 장군 Julius Caesar가 친구에게 배신당하면서 “You too, Brutus”를 말하며 생을 마감했다. Henry IV가 Pope Gregory VII와 충돌해 파문당하자 북이탈리아의 Canossa 성을 찾아가 3일 동안 눈 위에서 맨발로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던 일로 인해 ‘go to Canossa’라는 표현이 자존심을 접고 비굴한 용서를 구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나 결합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종교가 삶 속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에 반드시 비세속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 자체의 본연의 의미를 벗어나 정치적인 영향력에 깊이 관여하거나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물 중심으로 읽은 것 같다. 농군의 딸로서 프랑스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나 19세의 나이에 ‘마녀 사냥’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던 Joan of Arc, 지적 호기심과 창의력으로 다재다능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 Leonardo da Vinci,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중세 시대 가톨릭의 부패를 세상에 알리며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독일인 Martin Luther와 프랑스인 John Calvin, 현대 과학의 대부라 불리며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면 대치하며 종교 재판에 넘겨져 가택 연금 속에서 생을 마감한 Galileo Galilei,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 황제로 군림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을 펼쳤으나 워털루(Waterloo)에서 패한 후 영국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St. Helena)에서 외로운 생을 마감한 Napoleon,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층 갈등을 언급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The Communist Manifesto (1848)를 저술한 Karl Marx, 노예 제도 폐지의 쾌거를 이룬 Lincoln, 독일 통일에 기여한 외무장관 Bismarck,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Adolf Hitler,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 개발 기반을 마련한 덴마크인 물리학자 Niels Bohr 등등.

과학과 기술은 현재 문명의 이기를 도모하며 편리함을 가져왔으나, 못지않게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그럼에도 이제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도움 없이 살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결국 열쇠는 다시 인간에게 있는 것인가?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human)이 얼마나 비인도적(inhumane) 야수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과학과 기술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잊혀져서도 안 되며 침묵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억하며,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관용을 베풀며 나아가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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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unded Healer : Ministry in Contemporary Society - in Our Own Woundedness, We Can Become a Source of Life for Others (Paperback)
Nouwen, Henri / Darton,Longman & Todd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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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픔, 슬픔 없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한다. 누구나 저마다 다른 정도와 깊이의 상처가 있어서 이런 책에 대한 수요가 높을 수도 있다. 제목에 이끌려서 구매하였는데 읽다보니 목회자를 위한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심정으로 읽으니, 어느새 치료받은 느낌이 든다. Book Therapy가 그 어떤 특효약을 대신할 것인가?

현재의 강력한 포로가 되어 사는 현대인은, 의도치 않게 자신의 미래의 수동적 희생자가 되어 살아간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사는 핵인간(nuclear man)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역사적 혼란과 단절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자기 중심적 내향적 삶을 사는 핵인간은 어떤 외부적 현실도 그의 불안감과 외로움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핵인간의 삶의 두번째 특징은, 그를 이끌어 줄 권위자인 아버지가 없는 삶이다. 아버지 대신에 그의 동료가 기준이 되고, 동료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민감성을 드러낸다. 즉, 동료의 폭력에 노예가 된다(become enslaved by the tyranny of their peers). 아버지의 인도가 없다는 것은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그누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세상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거짓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의 욕구에 속박되어 있는 핵인간의 세번째 특징은 분노이다. 뿌리 깊은 불행, 우울, 불안감으로 가득찬 세상을 향한 경련성 발작과도 같은 공포와 소외감을 느낀다. inwardness, fatherlessness. convulsiveness의 특징을 안고 살아가는 핵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이들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이 없이 인간은 인간이라 불릴 수 없고, 오직 신만이 치유자가 되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인 우리도 누군가의 ‘내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becoming his tomorrow). 내일이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지를 잃을 것이고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병원의 낯선 환경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Mr. Harrison에게는 그를 기다리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고된 일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내일’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의미있는 내일이있었거나, 누군가가 그의 내일이었다면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처를 잘 직시하고 먼저 치료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잘 묶고 보듬으며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상처에 대한 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상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The way out is way in.) 상처가 꼭 타인으로부터 입은 흔적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 안고 가야하는 외로움, 내적 공허함, 파괴적 기대감도 우리를 괴롭히는 아픔과 상처가 아니던가?

외로움의 상처까지 잘 싸매고 안아주며, 마음을 열어 상대를 환대하고, 무법의 침입자라는 개념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타인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 치유자가 되어 보라고 한다. 나는 예전에, 내 마음을 먼저 추스려 회복이 되고 난 후에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대(hospitality)는 있는 자, 가진 자, 마음이 따뜻하고 온유한 자의 특권이라 생각했는데, 나처럼 상처 투성이인 자도 healer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엉터리 삶을 살아온 내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치료되어 온유함과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는 날은 영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어 누군가의 내일이 되길 촉구하는 것인가?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내 상처가 어느새 아물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픔이 있는데 자꾸 일어나라고 해서 가혹하다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나를 치료하시는 방법이었던가?

Being alive means being loved.
We can only love because we are born out of love.
We can only give because our life is a gift.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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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mixed review를 받은 것과 달리 역시나 나의 집중력 부족으로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과 독서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분량이 적다고 이해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조금씩 읽는 것은 허영이며 사치이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걸 다시 느낀다. 나의 지적 허영이 피로 쓴 작가의 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가까이 함이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목 자체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언어 천재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라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내는 일들이 결국엔 무의미하며,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즐겁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고 있을까?

무의미가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무의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In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existence. We must love insignificance, we must learn to love it. p. 113) 무의미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사랑해야함은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고 축제이기 때문인가? 지난 날 내가 엄청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며 안달하고, 흥분하고, 잠못 이루던 일을 생각해 보면 위의 말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만 흘러서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기억이 흐려진다.

심지어 무의미의 가치(value of insignificance), 총명함의 쓸모없음(uselessness of brilliance)에 대한 표현도 공감이 된다. 총명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자 또한 남자만큼 총명해야 된다는 의무와 부담감이 생기기에 총명함은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무의미함은 여자를 자유롭게 하고 경계심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사실 여자들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를 원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이성을 만난다면 실수할까봐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항상 긴장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Alain의 사과에 대한 표현도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은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하고 자신은 늘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며,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고, 서로 사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엄마의 사과를 받기 위한 그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 순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자가 승자이기에 먼저 사과함으로써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사과하는 자라고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벗기 위한 수단,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한 용서의 수단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낮은 자세이나 승자의 위치에서 하는 사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이든 사과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심지어 후자라 할지라도 쌍방의 사과가 허락되고 서로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사과의 시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척, 시늉‘ 조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무섭기도 하다. 몸이 매우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상식이 통용되고 있는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기본인 세상이 되면 좋겠다. I am an apologizer. That’s the way you made me. I feel good when we apologize to each other. Isn’t it lovely, apologizing to each other? (p. 103)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바꾸거나 정면으로 위험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저항이 있다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체념이 보이기도 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세상에 대한 힘겨운 싸움을 해 온 지식인이 결국 농담 속에서 안주하며 모든 싸움이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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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에 감동을 더하고 밤을 지새며 읽었던 톨스토이의 두 작품,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8)‘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1)’ 와도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써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책은 1886년에 발표된 책으로 톨스토이의 신앙적 고뇌가 담겨진 책이라 들었다. 정통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형식적 교리와 의식에 회의를 느끼던 그가 기독교에서 새로운 내적 질서를 찾아가는 과도기적 시점의 작품이라 들었다.

톨스토이의 깊은 고뇌가 어쩌면 바로 모든 인간의 원초적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반의 죽음은 살아 생전보다 더 근엄하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꾸짖음과 경고처럼 보인다고 첫장을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유의미한 삶을 살아라’ 등등의 사인일까?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자 누구인가?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과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인지, 살아 남은 자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으나, 이미 죽은 자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마치 내게는 부자연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을 한다. 알지만 일시적으로 애써 부인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자기 부정이 아닐까? 죽음은 터부시해야할 주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늘 기억하며, 하루를 헛되이 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나침반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반의 삶의 목표는 쉽고, 유쾌하고, 품위있게 사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조차 품격있는 거리(dignified aloofness)를 유지하며 자신의 편안함과 취미를 침해 당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불편하고 지저분하며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와는 무관한 삶이었고, 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뿐이었다. 삶의 흐름과 질서가 늘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어울리는 세련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안정된 삶이 그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 심해지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해야하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1남1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평온한 삶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의 삶 전체가 거짓과 사기였음을 알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그가 죽는다는 것만이 진실일 뿐 무기력, 외로움, 인간과 신의 잔인함, 신의 부재를 느끼며 아이처럼 울고 있는 이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성공가도를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그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그가 평생을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What if my whole life had been wrong?)또한, 어쩌면 해야할 것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깨닫게 된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가슴과 옆구리를 맞게 되고 숨쉬기 조차 힘들어진 그가 구멍으로 떨어져 바닥에서 빛(light)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실제로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무엇이 옳은 일인가? (What is the right thing?)를 생각한다.

결국, 그는 그 빛을 잡고, 비록 그동안 틀린 방향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 왔으나, 잘못 살아온 삶도 여전히 수정되고 교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멍의 바닥에 있던 그가, What is the right thing? 이라는 질문을 하고 나니, 누군가가 그의 손에 키스를 했고, 눈을 떠 보니 아들이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동정심과 연민을 얻은 두 사람은 하인(Gerasim)과 아들뿐이었다. 친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서운 상황보다,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절규하며 건강하지만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향해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던 그가,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 놓고, 죽음의 자리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되며(In pace of death there was light.)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건강하고 부유하여 모든 것이 평온할 때, 이반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하여 옳은 방향인지 점검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앞으로가 아닌 뒤로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반 같은 속물에게도 빛(light)은 여전히 기회를 주고 있다. 그의 삶이 바뀔 수 있고 교정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though his life had not been what it should have been, this could still be rectified.) 이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인가? 그래서 이반은 죽음 자체가 영원한 끝이 아니며, 죽음의 자리에 빛(light)이 있음을 알게 되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한다.

비판적,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톨스토이가 완전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빛(light), 아들(son), 교정되는(rectified)이라는 실마리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내 나름의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빛을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고,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으리라. 나처럼 뒤늦게 잘못 살아왔음을 알고 가슴을 칠때,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교정,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의 목표, 의미, 방향성을 늘 점검하고,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몸을 더 움직이고, 나 자신만의 유익과 편의만를 도모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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